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465화

밤하늘 아래, 속삭이는 파동

창밖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별빛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연들을 품고 반짝이는 듯했다. 스튜디오의 낮은 조명 아래, 지우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마이크 앞에 앉았다. 늘 그랬듯,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을 헤매는 이들에게 등불처럼 다가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지우입니다. 이 시간, 당신의 밤은 어떤 색깔을 하고 있나요? 혹, 아득한 그리움의 빛깔이라면, 혹은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의 반짝임이라면, 오늘밤 저의 목소리가 그 길을 밝히는 작은 별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잔잔한 클래식 기타 선율이 흐르고, 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매일 밤 수많은 이야기가 그에게 도착했지만, 어떤 사연들은 유독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오늘밤 읽어줄 사연이 바로 그러했다. 수아 씨가 보내온 편지였다.

옥상 위의 작은 숨결

“오늘은 수아 님의 사연입니다. ‘디제이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오랜 시간 제 마음 한 켠에 자리했던 작은 정원을 떠올리며 펜을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제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는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어요. 그 중 한 건물 옥상에는 아무도 모르는 저만의 비밀 정원이 있었죠. 바람이 불면 살랑이는 풀꽃들과, 이름 모를 작은 하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던 곳이었어요. 저는 그 꽃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곤 했습니다.’”

지우의 목소리가 한 글자 한 글자 공기를 타고 흘렀다. 스튜디오의 고요함 속에서 수아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그곳은 저와 준혁이의 비밀 아지트이기도 했습니다. 준혁이는 제 옆집에 살던 소꿉친구였죠. 우리는 해 질 녘이면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 오렌지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보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멋진 비행기를 만들 거야’, ‘나는 저 하얀 꽃처럼 어디든 뿌리내려 꿋꿋하게 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우리는 유치하지만 진심 어린 약속들을 주고받았습니다. 그 정원은 저희의 모든 꿈과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어요.”

지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약속과 꿈. 그 얼마나 아름답고 아득한 기억인가.

“‘하지만 어느 날, 재개발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낡은 건물들은 하나둘 철거되었고, 저희의 비밀 정원이 있던 건물도 사라졌어요. 하얀 꽃들이 가득했던 옥상은 시멘트 바닥이 되었고, 준혁이는 흔적도 없이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그렇게 저희의 작은 정원도, 저희의 우정도 사라진 듯했어요. 저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그 옥상과 준혁이를 잊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속 한 켠은 늘 비어있는 시멘트 바닥 같았죠.’”

사연을 읽는 지우의 눈빛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공터 같은 곳이 있을 터였다.

“‘세월이 흘러 저는 어른이 되었고, 그 동네는 이제 높은 빌딩들로 가득한 낯선 곳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문득 그곳이 보고 싶어 찾아갔습니다. 준혁이와의 추억이 서린 골목길은 사라지고, 번화한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죠. 그런데 말이에요, 디제이님. 우연히 빌딩들 사이에 난 아주 좁은 골목길 끝에서, 저는 기적 같은 풍경을 마주했습니다. 누군가 작은 공터를 가꾸어 놓은 곳이었어요. 작은 나무 한 그루와 함께, 옛날 저희 옥상 정원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하얀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어요. 마치 준혁이가 저에게 ‘아직 여기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지우는 숨을 고르며 마지막 문단을 읽어 내려갔다.

“‘어쩌면 희망은 사라진 줄 알았던 곳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잊혀진 줄 알았던 약속도, 다시 피어나는 꽃처럼 언젠가 다시 고개를 내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 작은 정원을 보며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제 마음속 시멘트 바닥에 새로운 씨앗을 심을 용기를 얻었습니다. 부디, 제 사연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수아 드림.’”

새로운 씨앗, 새로운 희망

지우는 편지를 다 읽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수아의 사연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의 과거 한 조각을 건드렸다. 그에게도 준혁이와 같은 이름의 친구, 그리고 함께 꿈을 심었던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었다. 그곳 역시 세월의 풍파 속에 사라졌고, 친구는 흔적도 없이 떠나버렸다.

“수아 님의 사연, 정말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수아 님처럼 마음속에 사라진 옥상 정원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들 말입니다. 작은 하얀 꽃처럼, 굳건하게 다시 피어나는 희망의 씨앗들을 말이죠.”

지우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수아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했다.

“어쩌면 준혁 씨도, 그 작은 정원처럼, 어디선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굳건히 피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수아 님처럼, 그 시간을 잊지 않고 새로운 곳에 씨앗을 심는 용기를 내고 있을지도요.”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낡은 상처 위로 새 살이 돋아나듯,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그 음악은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앤딩 포엠의 ‘오래된 정원’입니다. 수아 님께, 그리고 마음속 정원을 다시 가꾸려는 모든 분들께 바칩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이들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오늘밤만큼은 그 씨앗을 심어보는 건 어떨까요? 언젠가 그 씨앗이 다시 꽃을 피울 그 날을 기다리며 말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지우였습니다.”

음악은 계속 흘렀고, 지우는 마이크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아의 이야기 속 하얀 꽃들과, 아주 오래 전 자신과 준혁이가 함께 꾸었던 꿈들이 선명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꿈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숨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꽃을 피울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