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25화

멈추지 않는 계절의 속삭임

창밖은 흐렸다. 가을비가 시작된 지 며칠째, 세상은 온통 회색빛 장막에 갇힌 듯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지는 모습은 지혜의 마음속을 떠다니는 상념들처럼 아득하고 불분명했다. 길고 긴 여름의 흔적들이 씻겨 내려가는 자리에는 어느새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지혜는 문득 그 바람이 자신의 마음속 허기진 틈새를 후벼 파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최근의 일들이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갔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고 간 자리처럼,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진 듯한 공허함이 그녀를 짓눌렀다. 결정을 내리고, 또 받아들이고, 다시 걸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지혜에게는 거대한 소용돌이 같았다. 그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달았지만, 동시에 그 작디작은 존재의 발자국이 남기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모든 잔향이 가시지 않아, 그녀의 가슴 한켠은 먹먹했다.

테이블 위, 식어가는 찻잔에서 희미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혜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지만, 씁쓸한 차 맛은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그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가 식어가는 몸을 잠시 데워줄 뿐이었다.

그림자의 조용한 등장

그때였다. 늘 그랬듯이, 소리 없이 그림자(Geurimja)가 나타났다. 검은 털이 젖은 창밖 풍경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는 지혜의 옆 의자에 폴짝 뛰어올라 조심스럽게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이해와 위로가 담겨 있었다.

“왔구나, 그림자.”

지혜는 흐트러진 미소로 그를 맞았다. 언제나처럼 조용한 위안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손을 뻗어 그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자, 그림자는 작게 골골송을 부르며 지혜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 온기가 지혜의 차가워진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비가 계속 와. 이 비가 내 마음까지 다 쓸어 가 버렸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지혜는 한숨처럼 읊조렸다. 그림자는 지혜의 말을 알아듣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아.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고, 붙잡아도 결국 손아귀를 빠져나가 버리지. 모든 것이 영원할 것 같았는데, 결국은 그저 한때의 꿈이었나 봐.”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최근 그녀를 힘들게 했던 상실감,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림자는 한동안 말없이 지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마치 낡은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잡으려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손아귀를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세.”

지혜는 그림자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뜻이니?”

“세상에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 지금 네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낡고 부서져 사라질 것이지. 하지만 사라지는 것이 곧 끝을 의미하지는 않아. 사라진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시작을 위한 비움일 뿐이야.”

그림자는 창밖을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잠시 응시했다.

“저 빗방울들을 보렴. 하늘에서 떨어져 땅으로 스며들고, 다시 강물을 따라 흘러 바다에 닿겠지. 그리고 어느 날 다시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갈 테고. 그들은 붙잡히지 않아. 한 곳에 머무르려 하지도 않고. 그저 흐를 뿐이지. 흐르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이고, 사라지는 순간조차도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완성하는 거야.”

지혜는 그림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이야기는 늘 그랬듯 심오하면서도 단순했다. 붙잡으려 애쓰는 것, 그것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픈 일이잖아. 영영 볼 수 없다는 것, 다시는 느낄 수 없다는 건 너무나도 슬픈 일인걸.”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잃었던 것들, 그리고 멀어져 가는 인연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마음의 정원

“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지.” 그림자는 지혜의 손에 코를 비비며 말했다. “슬픔과 그리움은 네 마음에 피어나는 꽃과 같아. 그 꽃잎이 시들고 떨어져야만, 새로운 씨앗이 땅에 닿아 다시 움트고 돋아날 수 있는 거야. 네 마음의 정원을 항상 풍성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시들어가는 꽃을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보내주고 새로운 꽃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데 있어.”

“새로운 꽃이라…”

지혜는 그림자의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마음속 정원은 지금 시든 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꽃들을 치워낼 용기가 없었고, 새로운 씨앗을 심을 마음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강물이 영원히 흐르듯, 너의 시간도 영원히 흐를 거야. 그 흐름 속에서 너는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겪게 되겠지. 헤어짐이 두려워 만남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만남이 두려워 흐름을 멈출 수는 없어. 그저 존재하고, 경험하고,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전부야.”

그림자의 말은 파고드는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나무 같았다. 지혜는 그의 말 속에서 작은 위안을 찾았다. 아픔도, 슬픔도, 모두 살아가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는 일깨워 주었다.

고요한 이해

지혜는 그림자를 품에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녹여주었다. 그림자는 지혜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조용히 그녀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창밖의 빗소리는 여전히 이어졌지만, 더 이상 쓸쓸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그림자. 네 말 덕분에 조금은 알 것 같아.”

지혜는 속삭였다. 그녀는 이제 시들어가는 꽃들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픔을 피하기보다,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공허할지라도, 그녀의 마음속 정원에는 분명 새로운 씨앗이 심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림자는 만족한 듯 작게 하품을 했다. 그의 맑은 눈은 여전히 깊고 지혜로웠다. 세상의 모든 변화와 흐름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지혜에게 살아있는 교훈이었다.

창밖의 비는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햇살 한 줄기가 비쳐 들었다. 길고 긴 어둠 끝에 찾아오는 빛처럼, 지혜의 마음에도 잔잔한 평화가 찾아왔다. 그림자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영원히 흐르는 강물 같은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다. 지혜는 그 강물에 몸을 맡기고 흐름을 따라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