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51화

차분한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넘어 무릎 위에 펼쳐진 낡은 일기장 위로 스며들었다. 책장은 세월의 얼룩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른 꽃잎처럼 얇아진 종이 한 장을 넘겼다. 익숙한 할머니의 손글씨, 한 글자 한 글자에 스며든 지난 세월의 무게가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오늘은 일기장 151번째 이야기, 찢어진 페이지 사이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한 조각의 기억을 마주하는 날이었다.

할머니는 늘 당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말을 아끼셨다. 특히 전쟁 후 폐허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마치 깊은 우물 바닥에 가라앉은 자갈돌처럼 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이 일기장만이, 침묵 속에 묻혀 있던 할머니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오늘 내가 펼친 페이지는 찢어졌다가 간신히 테이프로 붙여진 흔적이 역력했다. 누군가 억지로 떼어내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할머니 스스로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였을까.

나는 숨을 고르고, 흐릿한 먹물로 쓰인 날짜를 확인했다. 1957년 초가을. 아직은 복구가 더딘 도시의 외곽,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젊은 할머니, 은자 씨가 걷고 있던 그 시절이었다. 글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내 숨겨진 격정으로 파동치기 시작했다.

1957년 9월 14일, 흐림

오늘, 지훈 씨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들녘의 바람은 차갑고, 내 볼 위로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흘렀다. 그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그 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그의 어깨에 스며든 내 눈물이, 이별의 징표처럼 느껴졌다.

삼촌은 다시는 지훈 씨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 우리 집안의 빚, 어린 동생들의 끼니, 병약한 어머니의 약값. 모든 것이 내게 짊어진 짐이었다. 나는 스무 살, 가장이 되어야 했다. 지훈 씨는 내게 떠나자고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오직 우리 둘만의 세상에서 살자고 했다. 그이의 눈은 간절했고,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꿈꾸던 모든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훈 씨의 손을 잡고 도망친다면, 나는 죄인이 될 터였다. 나를 믿고 있는 가족들, 그들의 눈빛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텅 빈 솥단지를 바라보며 밤새워 고민했다. 나의 행복과 가족의 생존.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었지만, 결국 선택은 잔인하게도 하나였다. 나 하나의 행복이 가족의 불행이 될 수는 없었다.

지훈 씨는 내게 낡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손수 수놓아 주신 것이라 했다. 깨끗하게 빨아 언제나 품에 간직하고 다니라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너무나도 슬프고 초라했다. 그이는 울지 않았다. 단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내 가슴을 찢어놓는 칼날 같았다.

해가 저물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지훈 씨는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돌아보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세상에서 영원히 멀어져 갔다. 내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자,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이 밤, 나는 다시는 웃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이 이토록 선명하다니.

내 선택이 옳았을까. 모르겠다. 다만, 나는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다. 내 심장의 한 조각이 뜯겨 나간 것만 같다. 이 아픔은 언제쯤 가실까. 아마 영원히 내 안에 남아 아물지 않는 상처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일기장의 글은 거기서 멈춰 있었다. 찢겨 붙여진 페이지의 다음 장은 텅 비어 있었고, 그 다음 장은 몇 달 뒤의 기록으로 넘어가 있었다. 마치 그 날의 고통이 너무 커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손을 들어 축축해진 뺨을 만졌다. 할머니의 일기장이 아닌,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줄만 알았던 할머니의 삶 속에, 이토록 애틋하고 절절한 이별이 숨겨져 있었다니. ‘지훈 씨.’ 그 이름은 할머니의 입에서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혹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하지만 이 일기장 속에서 지훈 씨는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젊은 할머니의 전부이자, 포기해야만 했던 행복의 상징으로.

할머니는 젊은 시절 그렇게 찬란한 사랑을 뒤로하고, 가족의 짐을 어깨에 메고 살았다. 빚을 갚고, 동생들을 키우고, 어머니를 모셨다.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모습 뒤에, 이토록 깊은 슬픔과 희생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며왔다. 할머니의 고된 삶이 비로소 이해되는 듯했다. 그녀의 강인함은 슬픔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는 늘 나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실 때, 가끔 아주 작은, 거의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셨다. 그 한숨 속에는 이 일기장에 담긴 고통의 흔적이 배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할머니의 깊은 바다 같은 눈빛에서 가끔 쓸쓸함을 읽곤 했는데, 이제야 그 쓸쓸함의 근원을 알 것 같았다. 이루지 못한 사랑, 포기해야 했던 꿈.

나는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마치 할머니의 젊은 날의 눈물과 함께 응축된 듯한 진한 회한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지훈 씨의 낡은 손수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할머니는 평생 그 손수건을 간직하고 살았을까. 아니면, 언젠가 미련을 끊어내기 위해 태워버렸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다.

할머니는 이제 치매로 인해 당신의 이름조차 희미해져 가는 노인이 되어 내 옆에 계신다. 이토록 선명한 과거를 간직했던 분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할머니의 잊혀가는 기억 속에서, 지훈 씨라는 이름은 과연 사라졌을까, 아니면 심연 가장 깊은 곳에 남아 마지막까지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까. 이 낡은 일기장이 할머니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이자, 동시에 그녀를 살아 있게 한 단 하나의 빛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덮인 일기장을 한참 동안 가슴에 품었다. 이제 할머니를 찾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흐릿한 기억 속에서, 나는 그날의 은자 씨와 지훈 씨를 아주 잠깐이나마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희망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