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병원 복도의 시계는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시간은 마치 얼어붙은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 듯했다. 서연은 낡은 의자에 기댄 채 희미한 벽등을 올려다보았다. 삼 일 밤낮을 잠 못 이루고 지새운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고통과 체념이 뒤섞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유리문 너머 중환자실에는 지우가 누워 있었다. 작은 몸이 수많은 의료기기에 연결된 채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와 기계음만이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지우의 손을 잡고 밤을 지새우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밝고 씩씩했던 아이가 이렇게 힘없이 누워있는 모습은 서연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는 것 같았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서연 씨…”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서연은 고개를 돌렸다. 하준이었다. 며칠 밤낮을 헤매다 나타난 듯, 그의 얼굴은 수염으로 거칠었고, 눈은 깊은 절망과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서연 옆에 조용히 앉았지만, 둘 사이에는 얼어붙은 침묵의 장벽이 놓여 있었다.
“연락이 안 되더라… 걱정했어.” 서연의 목소리는 너무나 건조해 마치 먼지를 뒤집어쓴 듯했다. 걱정이라는 말조차 형식적으로 들릴 만큼 그녀의 감정은 메말라 있었다.
하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서연은 반응 없이 손을 거두었다. 그 거절은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지우가 이 지경이 되도록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과 분노가 그를 휩쌌다.
“지우는… 어때?” 하준은 겨우 입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이… 가망이 없다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대.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서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미 모든 눈물을 쏟아냈을 터였다.
하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그 약속…’
겨울 눈꽃 아래 맹세했던 날
하준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수년 전, 젊고 순수했던 그들의 눈앞에 세상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울 남산 타워 아래, 흰 눈이 흩날리던 그날, 그는 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서연아, 약속해. 어떤 시련이 닥쳐도,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으려 해도, 난 너와 지우를 지킬 거야.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했잖아. 이 눈처럼 변치 않을 약속이야. 내가 너의 영원한 방패가 되어줄게.”
그때 서연의 눈에는 세상 모든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안겼고, 차가운 눈송이들은 그들의 뜨거운 약속을 지켜보는 증인처럼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날의 약속은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견고한 기둥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기둥은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준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때로는 비겁해졌고, 때로는 비굴해졌다. 오로지 서연과 지우를 위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그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발버둥 쳤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서연은 그런 하준의 고통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너무 많은 상처가 쌓여 있었다. 약속이라는 단어조차도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비수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어둠 속 한 줄기 빛
“마지막 희망은… 해외에서 진행되는 임상 실험뿐이라고 했어.” 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도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게다가 성공률도 극히 낮아.”
하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해외 임상 실험. 그것은 회장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아니, 회장님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쉽게 도와주려 하지 않을 거액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약속을 위해.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할게. 서연아. 믿어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우를 살릴 거야. 우리의… 우리의 약속을 잊지 않았어.” 하준은 간절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서연도 뿌리치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손에서 미약하지만,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하준아…” 서연의 눈가에 다시금 옅은 물기가 맺혔다.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희망 고문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 그저… 지우가 아프지 않고 편안해졌으면 좋겠어.”
그녀의 말은 하준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새로운 결심을 굳혔다. 지우가 포기하지 않는 한, 자신도 포기할 수 없었다. 서연이 놓아버린 희망의 끈을 자신이 다시 움켜쥐어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빛에는 지쳐 보이던 이전의 절망이 사라지고, 강렬한 의지가 타올랐다. 서연은 그런 하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어깨가 전과는 다르게 비장해 보였다.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하얀 눈발이 다시 시작되었다. 첫눈이 내리던 그날처럼, 가벼운 눈송이들이 그의 얼굴에 부딪혔다. 차갑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약속의 무게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맹세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겨울 눈꽃이 만발하던 언덕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서연과 어린 지우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는 사진 속 그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기다려줘, 서연아. 지우야. 아빠가… 아니, 내가 반드시 약속을 지킬게.”
하준은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명백했다.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사투를 벌여야 할 그곳으로.
복도에 홀로 남은 서연은 창밖을 응시했다. 밤하늘에서 소리 없이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병원 창문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얼어붙었던 희망의 조각들이 다시금 미약하게나마 빛을 내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의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이 지독한 시련의 끝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