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조각의 그림자
하루는 낡은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고즈넉한 미소를 머금은 여인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낯설면서도, 뼈아프게 그리운 감정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왔다. 지난밤, 산산조각 난 시간의 파편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유일한 조각이었다.
“또… 흐릿해져.” 하루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아. 대체 이 여인은 누구지? 왜… 왜 이렇게 슬프지?”
세린은 하루의 옆에 앉아 그의 떨리는 손을 조용히 감쌌다.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연민과 함께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났다. “하루… 괜찮아. 서두르지 마.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없었다. 하루는 기억을 잃은 시간 여행자였고, 그들은 수많은 시간대를 떠돌며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 헤맸지만, 조각들은 늘 그의 손아귀에서 부서지곤 했다. 이 사진은 가장 선명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파편이었다. 마치 그의 존재 자체가 이 여인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화연’이라는 이름
하루는 사진 뒷면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희미하게 새겨진 글자가 그의 손끝에 와 닿았다. ‘화연’. 세 글자였다. 짧고 간결한 이름이었지만, 하루의 머릿속에서는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잊혀진 강물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화연…”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순간, 마치 스위치가 켜지기라도 한 듯,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짧은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따뜻한 햇살 아래, 같은 얼굴의 여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는… 비명과 함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절망감이 뒤따랐다.
하루는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세린은 당황하며 그를 부축했다. “하루! 진정해! 무슨 일이야?”
“아니야… 괜찮아.” 하루는 숨을 고르며 겨우 말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름이야. ‘화연’. 이 이름이… 내 심장을 아프게 해. 세린, 너… 혹시 알고 있었어?”
세린의 얼굴에서 미묘한 표정 변화가 스쳤다.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그녀의 망설임을 드러냈다. “하루…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언제나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어.”
하루의 눈빛에 실망감이 스쳤다. “날 위해서라고? 하지만 내 기억은 너에게 달려 있잖아. 우리가 함께 이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아. 하지만… 네가 기억해야 할 것들은 너무나도 잔혹해. 너를 지키고 싶을 뿐이야.” 세린은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하루에게는 더욱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에는 하루가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1987년, 은하수 다방
사진의 모서리, 거의 보이지 않게 인쇄된 작은 글자가 하루의 눈에 들어왔다. ‘은하수 다방 – 1987년 늦가을’. 다방의 이름과 연도, 계절까지. 마치 누군가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선명했다.
“은하수 다방… 1987년 늦가을.” 하루는 천천히 읊조렸다.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세린, 우리가 가야 할 곳이야.”
세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복잡했다. “그 시대로 가는 건 위험해. ‘그림자’들이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징후가 있었어. 그들은 네가 과거의 특정 지점에 접근하는 걸 막으려 할 거야.”
“왜? 내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 그들에게 왜 위협이 되는 거지?” 하루는 물었다. 질문은 답을 요구했지만, 세린은 침묵했다.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내가 나를 찾아야만 해.” 하루는 사진 속 화연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 얼굴에서 자신의 슬픔의 기원을 찾는 듯했다. “이 슬픔의 근원을 알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날 막으려 한다면… 그건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겠지.”
결국 세린은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하지만 조심해야 해. 1987년은… 네게 매우 중요한 시기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시간대 중 하나야.”
그녀의 말에 하루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과연 그를 기다리는 미스터리일까, 아니면 파멸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멈출 수는 없었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를 부르고 있었다.
미지의 심연으로
시간 이동 장치가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윙 하는 낮고 규칙적인 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 익숙한 과정이었지만, 매번 새로운 시간대로 향할 때마다 미지의 두려움이 하루를 덮쳤다.
“하루… 네가 기억을 되찾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할지도 몰라. 네가 알던 모든 것이 뒤집힐 수도 있어.” 세린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고와 함께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내가 알던 모든 것?” 하루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뭘 안다고 말할 수 있지? 난 기억도 없고, 내가 누군지도 몰라. 그저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 헤매는 망령일 뿐이야. 모든 것이 변한다 한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그의 눈빛은 멀리, 사진 속 여인의 미소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잃어버린 과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분명 고통과 절망이 숨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의 해답 또한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장치의 빛이 강렬해지며 공간을 휘감았다. 어렴풋한 과거의 잔상이 스쳐 지나가고, 마치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압력이 그들을 짓눌렀다. 1987년의 늦가을, 은하수 다방은 그들에게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하루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기꺼이 미지의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잊었던 한 문장을 떠올렸다. “기억은 너를 살아가게 할 거야. 비록 그 기억이 너를 파괴할지라도.”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문장이 그의 심장에 깊이 박히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와 세린의 모습은 푸른 섬광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 제124화에서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