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24화

차가운 기억의 잔상

창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함박눈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며 오래된 한옥 기와 위와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두툼하게 덮었다. 하윤은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멍하니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댁 안채는 따뜻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겨울 강물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벽에 걸린 낡은 달력은 어느새 12월의 끝자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다시,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꽃이 흩날리던 겨울날, 지훈과 그녀가 함께 나누었던 그 약속의 날이.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십여 년 전의 겨울이 아른거렸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눈꽃으로 하얗게 피어나던 날, 덜컥거리는 오래된 놀이터 그네에 앉아, 어설프게 내밀던 작은 손에 깍지 끼워 웃던 지훈의 얼굴이 선명했다. ‘하윤아, 우리 어른이 되면 꼭… 여기서 다시 만나자.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 약속 하나로 그녀는 수많은 계절을 견뎌왔다. 그 약속이, 그녀 삶의 유일한 이정표였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다. 지훈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처음엔 유학을 갔다고 했다. 몇 년이 지나자 아예 소식이 끊겼다. 하윤은 매년 그 약속의 장소를 찾아갔지만, 지훈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주변에서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속삭였다. 특히 최근에는 부모님이 선 자리를 종용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재력 있는 집안의 후계자. 모든 것이 완벽한 조건이었지만, 하윤의 가슴은 납으로 만든 추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윤아, 뭘 그리 심각하게 보고 있니?”

뒤에서 들려오는 할머니 옥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하윤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창백한 얼굴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굽은 어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할머니의 모습에 하윤의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추운데 방에 계시지 않고…”

“괜찮다. 눈 오는 날은 어쩐지 바깥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할머니는 하윤의 옆에 조용히 앉아 창밖의 설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하윤은 할머니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옥순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세월의 지혜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 애가 남긴 것이 있단다.”

옥순의 말에 하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애’라 함은 분명 지훈을 뜻할 터였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 하윤은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옥순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방 한쪽의 낡은 서랍장을 가리켰다.

“내 서랍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거야. 이제는 네가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서랍장을 열었다. 퀴퀴한 나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작은 나무 상자. 그 안에는 낡은 편지 봉투 하나와, 그녀에게 익숙한 작은 은색 팬던트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팬던트에는 조그마한 눈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린 시절, 지훈이 선물해 주었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편지 봉투는 모서리가 해지고 색이 바래 있었다. 하윤은 봉투를 뜯으려 했지만, 손이 너무 떨려 제대로 잡을 수조차 없었다. 할머니가 조용히 그녀의 손을 감싸주었다. 따뜻하고 주름진 손길이 하윤의 마음에 작은 온기를 불어넣었다.

“지훈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몰래 나를 찾아왔었단다. 집안 어른들이 억지로 떠나보내는 것이었지.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했어.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저 사라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마치 과거의 아픔을 어루만지듯 잔잔했다. 하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상처 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것이었다. 오해와 단절의 십 년. 그 모든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윤은 마침내 편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십 년의 세월을 고이 간직한 지훈의 글씨체는 여전히 힘 있고 단정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하윤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하윤아, 만약 네가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내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하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야.’

편지는 지훈이 강제로 미국으로 보내져야 했던 이유, 가족 간의 오랜 갈등,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를 상세하게 담고 있었다. 그는 매년 약속의 날, 멀리서나마 그녀가 그곳에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편지를 써 보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에게 닿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나는 결국 돌아올 거야. 반드시. 그날,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네가 나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나는 너의 곁으로 돌아갈 거야. 만약 내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이 편지 속의 작은 씨앗 하나가 네 마음에 닿아, 너를 지켜줄 거라 믿을게.’

편지 속에 들어있던 것은 은색 팬던트 목걸이와 함께, 작은 봉투에 담긴 몇 알의 씨앗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하윤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내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할머니, 지훈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요?”

하윤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응시했다. 함박눈은 여전히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조용히 덮어내리고 있었다.

“그 애가… 몇 년 전부터 몸이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왔었단다. 그래서… 그래서 너에게 더 연락을 못 했던 모양이야. 자신의 병이 너에게 짐이 될까 봐…”

하윤은 손에 든 편지와 씨앗 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그녀를 위해 사라졌고, 그녀를 위해 병을 숨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를 오해하고, 기다리고, 때로는 원망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창밖의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하얀 세상 속에서 하윤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약속은 이제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진 시간을 되찾고, 오해를 풀고, 병마와 싸우는 한 사람을 향한 처절한 외침이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찾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윤은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망설임이나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단단한 의지, 그리고 약속을 향한 맹렬한 집념이 그 안에 타오르고 있었다. 지훈의 편지를 품에 안고, 그녀는 차가운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 눈 속에서, 하윤은 새로운 약속을 맹세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지훈을 찾아갈 차례였다.

새로운 맹세

하윤은 품에 안은 편지봉투 속 씨앗을 만졌다. 지훈이 심어달라고 했던 이 작은 씨앗들이, 어쩌면 그가 살아있다는 마지막 희망의 증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거대한 눈보라 속에서도, 저 멀리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굳건히 서 있었다. 그 나무는 마치 그녀의 흔들림 없는 의지를 닮은 듯했다. 약속의 장소. 그곳에 홀로 서서 눈을 맞던 어린 시절의 자신과 지훈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때 지훈이 자신에게 건넨 것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 그리고 서로를 향한 변치 않는 믿음이었다.

“하윤아…”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녀의 결심을 다독이는 듯했다.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렴. 어미는… 그저 네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하윤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더 이상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훈이 자신에게 준 이 작은 희망의 씨앗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훈을 찾아야 했다. 설령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더라도, 그가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하고 있더라도, 그녀는 그 옆에 서 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이제부터 진정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