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지도 위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점을 따라 지훈은 느리게 차를 몰았다. 비가 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스팔트는 짙은 색을 띠고 있었고, 가로수 잎새에는 영롱한 물방울들이 방울져 있었다. 지난밤, 그는 오랫동안 잊혔던 단 하나의 이름, ‘윤서’라는 필명을 쓰는 작가가 이 작은 골목에서 작품 활동을 했었다는 실낱같은 정보를 손에 넣었다. 서연이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던 스케치북에 적힌 시구와 너무나 흡사한 제목의 작품이 소규모 전시회 도록에 실려 있었다는 제보였다. 희미한 희망이었지만, 지훈의 심장을 다시금 거세게 뛰게 하기엔 충분했다.
차는 익선동의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고즈넉한 한옥들이 즐비한 이곳은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가는 듯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차를 주차하고, 심장이 터질 듯한 불안감과 기대감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도록에 적힌 주소는 한옥을 개조한 작은 갤러리였다. 유리창 너머로 어슴푸레 그림자가 비쳤고, 오래된 나무 문은 그 자체로 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지훈이 문을 열자, 낡은 나무 문지방에서 고유의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지 않았지만,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추상화들과 은은한 아로마 향이 어우러져 묘한 평온함을 주었다. 안쪽에서 한 중년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온화한 눈매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떤 그림을 찾으시는지요?”
지훈은 애써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혹시, 윤서라는 작가의 작품이 아직 남아있습니까? 또는 그분을 아시는지요?”
여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윤서 작가님요? 아, 그분은 몇 달 전에 이곳을 떠나셨어요. 원래 작업실로 쓰시던 공간이었는데, 개인 사정으로 정리하시게 됐습니다.”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또다시 놓쳤다는 좌절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떠나셨다구요… 혹시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야 해서…”
여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부분이라… 그분이 원치 않으실 겁니다.”
지훈은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153번째의 실마리가 또다시 허망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갤러리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서연의 흔적, 단 하나의 조각이라도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그때, 갤러리 구석의 낡은 진열장 위에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무 오르골이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뚜껑에는 어린 시절 서연과 지훈이 함께 보았던 별자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태엽을 감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오래된 팝송의 한 구절. 그들이 처음 만나던 여름날, 서연이 흥얼거리던 바로 그 노래였다.
지훈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 이 오르골도 윤서 작가님의 것입니까?”
여인은 놀란 듯 지훈을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작업실을 정리하시면서 이것만은 차마 가져가지 못하고 두고 가셨어요.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네요. 특별한 물건인 듯해서 제가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지훈은 오르골을 품에 꼭 안았다. 서연이었다. 분명했다. 그녀의 섬세한 손길, 그녀의 기억, 그녀의 아픔이 이 작은 오르골에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이분은 제 첫사랑입니다. 이름은 서연이고… 윤서라는 이름은 필명이었군요.”
여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서연… 그렇군요. 윤서 작가님은 이곳에 오시기 전부터 많은 일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세상과 거리를 두려 하셨죠. 이곳에 계실 때도 늘 혼자였습니다. 그림만이 그분의 유일한 친구처럼 보였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지훈의 눈을 응시했다. “어느 날, 한 분이 그분을 찾아오셨습니다. 아주 오랜 인연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분이 윤서 작가님을 데려가셨습니다.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보호하듯… 세상으로부터 감싸 안으려는 듯했습니다.”
“보호하듯… 누구였습니까?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지훈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높아졌다.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저도 자세히 모릅니다. 윤서 작가님께 가족 같은 분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윤서 작가님은…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림을 그릴 때만 겨우 빛을 발했죠. 그분을 데려간 그분은 윤서 작가님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정말 모릅니다. 그분들이 원치 않으셨으니까요.”
지훈은 망연자실했다. 서연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녀를 그 고통으로부터, 혹은 세상으로부터 숨기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찾아 헤매는 동안, 그녀는 또 다른 상실 속에서 살고 있었을까?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그의 귀에 슬픈 자장가처럼 들렸다. 서연은 그를 잊은 걸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에게 알려질 수 없는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는 걸까.
지훈은 오르골을 품에 단단히 안고 갤러리를 나섰다. 비는 완전히 그쳤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서연은 살아있었다.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잡히지 않는 그림자였다. 그리고 이제, 그녀를 보호하려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 보호가 그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를 더욱 가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훈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오르골이 그의 손에 닿은 이상, 그는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매는 여정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더욱 깊어질수록, 그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다음 단서는 무엇일까? 그녀를 데려간 그 사람은 누구일까? 지훈의 탐정 인생은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