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504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듯, 공기에는 스산한 서늘함이 감돌았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었다. 은지는 자신의 작업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흙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흙의 감촉은 늘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손끝에 닿는 흙은 마치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수없이 빚고 깨고 다시 빚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 작은 작업실에서, 그녀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흙과 함께 보냈다.

창밖으로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감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은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최근 몇 년간, 그녀의 작품 세계는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새로운 영감은 바닥났고, 손끝은 굳어가는 듯했다. 지난 가을에 열었던 작은 전시회마저 기대만큼의 반향을 얻지 못했다. 주변의 따뜻한 위로 속에서도, 은지 안에는 깊은 회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밤은 그런 은지의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 작업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가느다란 눈으로 은지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밤의 눈빛은 늘 그래왔듯이 깊고, 어딘가 아득한 지혜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은지가 한숨을 쉬며 흙을 내려놓자, 밤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은지에게 다가왔다. 부드러운 털을 은지의 팔에 비비고, 이내 머리로 그녀의 손을 툭 치며 제 존재를 알렸다.

“밤아, 너도 아는구나. 내 마음이 요즘 얼마나 시들어 있는지.”

은지는 밤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밤은 고롱고롱 낮은 소리를 내며 더욱 몸을 밀착했다. 그 작은 온기만으로도 은지의 얼어붙은 마음은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 흙이… 이젠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 것 같아. 내 마음속의 샘이 말라버린 걸까? 밤아, 내가 과연 계속할 수 있을까? 이 길을… 이젠 너무 지치고, 두려워.”

그녀의 목소리는 얇게 떨렸다.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깊은 불안감이 밤 앞에서 기어이 터져 나왔다. 밤은 고개를 들어 은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호박색 눈동자에 은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 눈빛은 위로가 아니었다. 연민도 아니었다. 그저 깊은 이해와 침묵의 공감이었다. 마치 ‘나는 네 곁에 있고, 너는 너의 길을 갈 것임을 안다’고 말하는 듯했다.

밤은 갑자기 작업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작업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뒤돌아 은지를 향해 작게 ‘야옹’ 하고 울었다. 마치 ‘이리 와’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은지는 밤의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흙투성이 손을 대충 닦아내고 밤의 뒤를 따랐다.

밤이 향한 곳은 작업실 뒤편의 작은 마당이었다.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맞는 곳. 그곳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늙은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은지는 이 매화나무를 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다. 가지들은 비틀리고 갈라져 있었으며, 언뜻 보기에 생명이 없는 듯했다. 밤은 그 매화나무의 밑동에 가만히 앉아 은지를 올려다보았다.

은지는 밤의 행동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문득, 아주 오래전 겨울이 떠올랐다. 밤이 처음 이 집에 찾아왔던 해의 겨울이었다. 그때의 은지는 지금보다 더 외롭고 불안했다. 젊은 예술가의 길은 언제나 험난했고, 막 시작한 도예가로서의 삶은 위태로웠다. 그때 밤은 길고양이답지 않게 당당하고, 동시에 알 수 없는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 작은 생명체가 홀로 겨울을 견뎌내는 모습은 은지에게 큰 위안이자 동기부여가 되었었다.

“밤아, 기억하니? 네가 처음 왔던 겨울에도 내가 참 많이 힘들어했었지. 그때도 네가 그랬어. 저 매화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렸지.”

은지는 매화나무 가지를 손으로 쓸었다. 메마른 가지 끝에서 아주 작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면 그저 볼품없는 작은 돌기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그 안에는 생명의 씨앗이 단단하게 움트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에도 굳건히 버티며, 봄을 기다리는 작은 희망이었다.

“그래… 너는 늘 그랬지. 이 매화나무처럼.”

은지의 눈빛이 일순간 빛났다. 밤은 그 눈빛을 읽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은지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가르랑거렸다. 매화나무는 매년 겨울,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가도 어김없이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꽃을 피워냈다. 그 굳건한 생명력은 수십 년간 은지의 삶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의 작품들도, 그녀의 삶도,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결국은 다시 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어려움에 부딪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은지는 매화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품에 안았다. 밤의 털은 따뜻했고, 심장의 고동은 잔잔했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동안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했음을 깨달았다. 마르지 않는 샘물은 없지만, 깊은 샘은 쉬이 마르지 않는 법. 잠시 휴식기를 가질 뿐, 은지 안의 창작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었다. 밤이, 그리고 이 오래된 매화나무가 그녀에게 늘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고마워, 밤아. 네가 항상 나에게 보여주는구나. 다시 시작할 힘을… 견뎌낼 용기를.”

은지는 밤의 부드러운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밤은 그녀의 품 안에서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밤과 매화나무가 오랜 세월 그녀의 삶에 준 교훈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 있음’ 그 자체의 위대함, 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의 가치였다.

작업실로 돌아온 은지는 더 이상 흙을 만지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오래된 작업복 주머니에서 닳고 닳은 스케치북 한 권을 꺼냈다. 수많은 습작과 아이디어 스케치들이 빼곡히 채워진 스케치북이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과거의 열정과 에너지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밤은 그녀의 무릎 위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편안한 숨소리를 내쉬었다.

그날 밤, 은지는 잠자리에 들기 전, 작은 촛불을 켜두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촛불은 매화나무 가지 끝의 작은 봉우리처럼 연약하지만, 동시에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드리워졌던 무거운 그림자는 한결 가벼워졌다.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다시 시작될 것이다. 밤이 늘 그랬듯이, 매화나무가 늘 그랬듯이. 그리고 은지는 그 모든 순간을 밤과 함께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