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508화

새벽녘, 고요를 머금은 세상은 희고 부드러운 장막에 덮여 있었다. 창밖으로 손가락만 한 눈송이들이 춤추듯 내려앉더니, 이내 거대한 꽃잎처럼 흩날리며 도시를 온통 은빛으로 물들였다. 한지우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 창가로 향했다. 코끝을 스치는 싸한 한기에도 아랑곳 않고, 차가운 유리창에 손바닥을 짚었다.

지난밤 캔버스 위에서 씨름하던 물감 냄새가 옅은 커피 향과 뒤섞여 스튜디오를 채웠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온통 새하얀 풍경이었다. 눈이 오던 날의 약속, 그 오랜 맹세가 이 첫눈과 함께 매년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 피어났다. 이제는 희미해질 법도 한데, 겨울의 첫눈은 언제나 그날의 기억을 선명하게 불러왔다.

‘지우야, 이 눈이 다시 내릴 때까지, 우리는 변치 않을 거야.’

오래전, 풋풋한 사랑으로 뜨거웠던 열아홉의 준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잊을 수 없이 생생했다. 한껏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내밀었던 작은 장갑, 그리고 그 장갑 속에 감춰져 있던 한 쌍의 반지를 쥐여주며, 눈밭 위에 함께 새겼던 미래의 그림들. 그 모든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빛나던 언덕 위에서,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이던 그날, 그들의 약속은 겨울 눈꽃처럼 투명하고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고, 눈은 매년 약속처럼 내렸지만, 준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는 그녀의 작품 속에 스며들어 슬픔과 아름다움의 경계를 오가는 깊이를 더해 주었지만, 지우의 마음 한편은 늘 빈 액자처럼 허전했다.

테이블 위, 식어버린 커피잔 옆에는 미완성된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폭설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배경은 온통 눈보라로 뒤덮여 있었고, 여인의 어깨 위로 쌓인 눈은 차가움보다는 어딘가 모를 기다림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녀의 손에서 붓이 떨어져 나간 지는 꽤 오래되었다. 이 그림이 완성되어야만, 자신의 마음속 폭풍도 잠잠해질 것만 같았다.

“지우야, 벌써 일어났어? 첫눈인데도 새벽부터 작업했나 보네.”

스튜디오 문이 열리고 강태민이 들어섰다. 그는 그녀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그녀의 재능을 누구보다 아끼는 갤러리스트였다. 태민의 손에는 따뜻한 차와 갓 구운 빵이 들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녀를 챙기는 다정한 얼굴이었다.

“새벽에 눈 뜨니까 온통 하얀 세상이더라. 잠이 오겠어?” 지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림은 여전히 그대로네. 태민아.”

태민은 캔버스 앞에 서서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았다. “점점 더 깊어지는 것 같아. 처음엔 슬픔만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 슬픔 속에서 피어나는 힘이 보여. 곧 완성될 거야, 지우야. 네가 진정으로 마음을 다잡는 순간.”

지우는 태민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을 다잡는다는 것. 그게 준호를 놓아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녀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매년 내리는 첫눈은 그녀에게 준호를 다시 만나게 해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잊으라는 허락 또한 내려주지 않았다.

“이번 전시회, 정말 중요해. 네가 얼마나 이 순간을 위해 노력했는지 내가 가장 잘 알잖아. 이제는… 과거에 갇혀 있지 말고, 네 미래를 그려봐.” 태민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미래? 준호가 없는 미래는 늘 미완성처럼 느껴져, 태민아.”

지우의 눈가에 이내 눈물이 맺혔다. 눈보라 치는 캔버스 속 여인처럼, 그녀의 마음도 고독한 폭풍 속에 갇힌 듯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 그녀는 준호의 얼굴을 흩날리는 눈송이 속에서 보았다.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변심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을까. 수백 번도 더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때, 스튜디오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발신자 표시에는 낯선 번호가 찍혀 있었다. 지우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지우 씨 되십니까? 법무법인 한울입니다. 이준호 씨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준호’. 그 이름 석 자가 그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5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준호 씨에게 무슨 일이…?” 겨우 입을 뗀 그녀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만나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준호 씨가 한지우 씨께 남긴 중요한… ‘유품’이 있습니다.”

유품이라니. 그 단어가 지우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수화기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민이 그녀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지우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 유품이라는 게… 대체 뭔가요? 준호 씨는… 어디에…”

“이준호 씨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곳은 해안가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오래된 등대 아래, ‘바다향기’라는 이름의 찻집을 기억하십니까?”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바다향기 찻집. 준호와 그녀가 처음 함께 여행을 떠났던 곳, 그리고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던 추억의 장소였다. 준호가 고아가 된 후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곳이기도 했다.

“그곳으로 오시면 모든 것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준호 씨는… 한지우 씨께 이 편지를 전해달라 부탁했습니다.”

남자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만날 장소와 시간을 일러주고 전화를 끊었다. 지우는 멍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유품. 등대 아래 찻집. 편지. 모든 것이 뒤섞여 그녀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준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과, 유품이라는 단어가 주는 절망감 사이에서 그녀는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지우야, 무슨 일이야? 누가 전화했어?” 태민이 다급하게 물었다.

지우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송이들이 이제는 희망의 빛인지, 아니면 차가운 이별의 조각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미완성된 캔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폭설 속 홀로 서 있던 여인은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견뎌내고 운명과 마주하려는 듯, 단단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림 속 여인의 눈빛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 약속의 끝이 어디인지, 준호의 흔적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해주려 하는지,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태민아, 나, 잠시 여행을 다녀와야겠어.”

지우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단단했다. 그녀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준호와 함께 맞추었던 반지를 꺼내어 목걸이에 걸었다. 차가운 금속이 그녀의 가슴에 닿자, 잊었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코트를 움켜쥐고 스튜디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첫눈이 펑펑 쏟아지는 세상 속으로.

그녀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약속의 끝에서, 지우는 준호를 다시 만나게 될까. 아니면, 이 겨울의 끝에서, 그녀는 영원히 준호를 떠나보내야 할까. 모든 답은 등대 아래, 바다향기 찻집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