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502화

봄의 문턱에서

창가에 드리운 흰색 커튼이 살랑이며 아지랑이 같은 햇살을 거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윤은 따스한 기운이 내려앉은 마루에 앉아 낡은 앨범을 넘기고 있었다. 옅은 커피 향과 함께 코끝을 간질이는 건 싱그러운 흙내음과 막 피어나는 새싹들의 향기였다. 길고 긴 겨울의 끝에서, 마침내 봄이 제 온전한 얼굴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작은 정원에는 매년 이맘때면 연분홍 꽃잎이 흩날리는 살구나무와 노란빛으로 눈부신 개나리가 앞다투어 피어나곤 했다. 하윤은 그들의 생명력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시리고 저려왔다. 꽃들은 매년 새롭게 피어나고, 또 지기를 반복했지만, 그녀의 시간은 어느 한 계절에 갇혀버린 듯 멈춰 있었다.

앨범 속에는 해맑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 있었다. 앙증맞은 손으로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그리고, 잔디밭을 뛰어다니며 깔깔대던 작은 그림자. 수아. 스물여섯의 하윤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던 그 이름은 이제 아련한 신기루처럼 멀어져 있었다. 10년, 아니, 이제는 12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하윤은 수아의 흔적을 쫓아 헤매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 그녀를 맞이한 것은 차가운 침묵과 더 깊어진 절망뿐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잊힐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아는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박힌 가시처럼, 아무리 뽑아내려 해도 깊이 박혀 고통을 주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시 주변으로 추억이라는 살점이 자라나 더욱 단단히 고정될 뿐이었다.

오늘 불어오는 봄바람은 유난히 부드러웠다. 정원 한쪽에 심어둔 라일락 나무의 작은 잎들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이 봄바람도, 그저 잠시 잊고 지낸 상처를 다시 건드리는 잔인한 계절의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하윤은 생각했다. 희망은 고문과도 같았다.

오래된 편지 봉투

초인종 소리가 앨범 속 정지된 시간의 막을 찢고 들어왔다. 하윤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익숙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지훈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고 빛바랜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먼 길을 걸어온 듯, 봉투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이름 모를 얼룩까지 묻어 있었다.

“지훈아.” 하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지훈의 표정에서 무언가 평소와 다름을 감지했다. 희미한 기대감, 혹은 그보다 더 큰 불안감이 그의 얼굴에 교차하고 있었다.

지훈은 말없이 봉투를 내밀었다.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흔들렸다. 그는 하윤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수아가 사라진 날부터 그녀의 곁을 지키며 함께 절망하고 함께 작은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헤맨 동반자였다. 그는 하윤의 눈빛을 읽어낼 수 있었고, 하윤 또한 그의 침묵 속에서 어떤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뭐야?” 하윤의 손이 덜덜 떨렸다. 봉투를 받아 든 그녀의 손바닥에 낡은 종이의 거친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지훈은 한숨을 내쉬며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몇 주 전부터 연락이 왔었어. 너무 불분명해서, 너에게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어.”

“불분명한 게 뭔데? 지훈아, 말해줘. 제발.” 하윤은 애원하듯 말했다. 12년 동안 불분명한 단서에 수도 없이 기대를 걸었고, 또 수도 없이 실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훈의 눈빛이 달랐다.

지훈은 마른 침을 삼켰다. “오지랖 넓은 시골 우체국 직원이 있었어. 시골 마을이라 택배나 우편물 검수가 꼼꼼하지 않다는 걸 이용해서, 불우한 아이들을 돕는 자선 단체에 온 편지들을 훔쳐보는 나쁜 버릇이 있었지.”

하윤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지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편지 중에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주로 모았다고 해. 그러다 어느 날, 한 자선단체에 기부 물품과 함께 온 편지 봉투에서 익숙한 그림체를 발견한 거야. 그 그림이… 12년 전, 네가 수아의 실종 전단에 실었던 그림이랑 너무 흡사하다는 걸 알아본 거지.”

하윤의 심장이 발작하듯 미친 듯이 뛰었다. 수아의 그림? 수아는 그림 그리기를 끔찍이 좋아했다. 특히, 작은 토끼를 그리는 것을 즐겨했다. 그녀가 실종 전단에 실었던 것도 바로 수아가 그린 토끼 그림이었다. 하윤은 손에 쥔 봉투를 펼쳤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낡은 편지 한 장과 함께 접힌 종이였다. 편지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은하라고 합니다. 저는 아빠가 없어요. 엄마는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어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요. 이 그림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윤의 시선은 편지를 지나 그 옆에 놓인 그림으로 향했다. 색연필로 서툴게 그려진 그림. 큰 귀를 쫑긋 세우고, 작은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는 흰색 토끼 한 마리. 그 토끼는 12년 전 수아의 스케치북에 가득했던, 바로 그 토끼였다.

희망과 절망의 그림자

“말도 안 돼… 이건… 이건 수아의 그림이야…” 하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림을 움켜쥐고 흐느꼈다. 그동안 억누르고 억눌렀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했다.

지훈은 하윤의 어깨를 조용히 감쌌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그림체가 비슷하다고 해도, 다른 아이일 수도 있고… 하지만, 이 우체국 직원이 은하라는 아이가 사는 동네를 기억하고 있어. 작은 시골 마을이야. 자선단체도 그곳에 몇 번 방문했었고.”

“그럼… 그럼 수아가 그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야?” 하윤은 겨우 흐느낌을 멈추고 지훈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은 기댈 곳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위태로웠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12년 동안 우리가 찾았던 어떤 단서보다도 구체적이야. 우리가 알던 수아의 이름은 아니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개명했을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길러졌을 수도 있고… 너무 많은 가설이 가능해.”

하윤은 손에 쥔 그림과 편지를 번갈아 봤다. ‘김은하’.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토끼 그림은 너무나 선명하게 수아의 필체와 닮아 있었다. 아이의 서툰 글씨에서 엄마 없이 아픈 엄마를 돌보는 아이의 외로움이 묻어났다. 수아도 외로웠을까? 12년 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울었을까?

“그곳으로 가야 해. 당장.” 하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억누를 수 없는 결단이 서려 있었다.

지훈은 하윤의 손을 잡았다. “그래, 당연히 가야지. 이미 그 마을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어. 서울에서 꽤 멀어. 강원도 산골 마을인데, 그곳에 작은 보육 시설이 있고, 자선 단체와 연계되어 있다고 해. 우체국 직원이 기억하는 은하라는 아이는 그 시설에 잠깐 머물다 나온 적이 있다고 했어. 지금은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하고.”

“보육 시설… 엄마가 아프다고 했는데…” 하윤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만약 수아가 다른 가정에 입양된 것이라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길러지다 다시 혼자가 된 것이라면? 그녀의 딸이 12년 동안 겪었을 고난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윤아, 너무 앞서가지 마.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 우리, 가서 확인해야 해. 냉정하게.” 지훈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12년 만에 찾아온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이 희망은 너무나 가볍고 약해서, 한 번의 거친 숨결에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거대해서 그녀의 존재 전체를 흔들었다.

봄바람의 속삭임

창밖에서는 여전히 봄바람이 불어왔다. 라일락 나무의 작은 잎들은 이제 흔들림을 멈추고, 햇살 아래서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그녀의 정원에는 매년 새로운 꽃들이 피고 졌지만, 올해의 봄은 달랐다.

이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단순한 정보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12년 동안 얼어붙었던 하윤의 심장을 녹이고, 정지된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생명의 숨결과도 같았다. 비록 이 길이 다시 절망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멈춰 있을 수 없었다.

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봄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 속에서 그녀는 12년 전 수아의 웃음소리를,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훌쩍 커버렸을 수아의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지훈아, 언제 갈 수 있어?”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갈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굳건한 음성이었다.

지훈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도 비로소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준비되는 대로. 당장 내일이라도.”

하윤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봄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손에 쥔 토끼 그림을 조심스럽게 접어 품에 넣었다. 이제 그녀는, 12년 만에 다시 길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그녀를 잊고 살았던 삶의 목적지로 이끄는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