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503화

어둠 속에서 피어난 이름

묵직한 가방끈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지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버스는 한참 전에 읍내에서 마지막 승객들을 내려놓고 돌아갔고, 이제는 이 오래된 해안 마을 해조리까지 가는 길은 오직 그녀의 두 발에 달려 있었다. 굽이진 길을 따라 걸을 때마다 짠 내 섞인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쳤다. 바다 쪽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마치 할머니의 나지막한 속삭임 같았다.

낡은 일기장 속에서 발견한 지명, ‘해조리’. 단 한 줄, 그리고 흐릿한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한 줄에서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과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영수야, 엄마는 늘 너를 기억한단다. 해조리 언덕배기에서 노을을 보며 너를 기다리던 날들처럼…’

그 한 문장이 지혜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할머니의 삶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이름, ‘영수’. 그리고 그 이름을 감싸고 있는 듯한 할머니의 깊은 슬픔. 지혜는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해는 이미 서쪽 바다로 기울기 시작했고, 붉게 물든 하늘은 마을의 오래된 지붕들을 더욱 아련하게 만들었다.

일기장의 흔적을 따라서

지혜는 다시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종이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장자리가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1958년 늦가을, 해조리.
오늘도 노을이 졌다. 영수는 오늘도 오지 않았다. 병이 나았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소식이 없을까.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벌을 받는 걸까. 그 아이를 두고 떠나야 했던 나의 어리석음, 이기심 때문일까.
정숙 언니가 영수에게 내가 보낸 옷을 잘 전달했다고 했다. 언니는 “기다리면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하고 위로했지만, 언니의 눈빛 속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사랑스러운 나의 작은 새, 영수. 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한데 모으는 것만 같구나.

정숙 언니. 그 이름이 지혜의 뇌리에 박혔다. 이 해조리에서 할머니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바로 ‘정숙 언니’일 것이었다. 지혜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마도 할머니는 이곳 해조리에서 ‘영수’라는 아이를 낳았고, 어떤 사연으로 인해 그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것이다.

지혜는 일기장 속 희미한 흑백 사진을 바라봤다.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 위에 서 있는 젊은 할머니의 모습. 아이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할머니의 미소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사진 한 장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을까.

해조리 언덕배기에서

지혜는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으로 향했다. 일기장에 쓰인 ‘해조리 언덕배기’라는 말이 잊히지 않았다. 언덕 위에는 돌담이 정겹게 쌓인 작은 초가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집 앞 마당에는 키 작은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낡은 평상 위에는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이 앉아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저… 안녕하세요.” 지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할머니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는 깊은 주름들이 파도처럼 새겨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지혜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누구신고? 이렇게 깊은 산골에 웬 젊은 아가씨가… 길을 잃었능교?”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지혜는 가방에서 할머니의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제 할머니가 여기에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은 김영순입니다. 혹시… ‘정숙 언니’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김영순’이라는 이름에 할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이름은 분명 그녀의 기억을 두드린 듯했다. 할머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혜의 손에 들린 낡은 일기장을 응시했다.

“영순이라… 영순이가 아직도 이걸 간직하고 있었구마.”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내가 정숙이다. 영순이의 정숙 언니.”

지혜는 숨을 들이켰다. 드디어 찾았다. 할머니의 비밀을 함께 간직한 사람.

“저희 할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일기장을 제가 물려받았는데, 여기에… ‘영수’라는 아이 이름이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이 해조리에서 그 아이를 너무나 그리워하셨다고….” 지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숙 할머니의 얼굴에 슬픔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있었다.

“영수라… 그래, 영수지. 그 아이는… 영순이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한 아이였지. 내가 다 이야기해줄게. 영순이가 왜 그 아이를 두고 떠나야 했는지, 그리고 그 아이가 어떻게….”

정숙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지혜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지혜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의 오랜 아픔이, 이제 그녀의 손녀에게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밤, 해조리 언덕배기에서 할머니의 숨겨진 이야기가 마침내 빛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빛은 과연 어떤 그림자를 드리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