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31화

차고 건조한 바람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오래된 마루 틈에서 웅크린 먼지들을 흔들었다. 미나는 두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쥐었지만, 차가운 공기는 뼛속까지 스미는 듯했다. 어쩌면 공기보다 더 차가운 것은 그녀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그녀의 삶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작은 조각배 같았다. 겨우 균형을 잡는가 싶으면 또 다른 파도가 덮쳐왔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탁자 위, 오래된 가계부가 펼쳐져 있었다. 붉은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숫자들이 그녀를 짓누르는 듯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미래라는 미지의 바다가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인 듯했다.

그때였다. 무릎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그녀의 긴장한 어깨를 살며시 쓰다듬는 것 같았다. 미나는 고개를 숙여 달을 내려다보았다. 달은 늘 그랬듯, 태평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지그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짙푸른 밤하늘을 담은 듯한 두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달아, 나… 요즘 정말 너무 힘들어.”

미나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달은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꼬리를 흔들었다. 마치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말없는 위로에 미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 달과의 대화는 소리 없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이 더 익숙했다. 서로의 마음을 눈빛으로, 작은 몸짓으로 읽어내는 시간들이 쌓여온 지 벌써 백 삼십여 개의 계절이 지났다.

“내일이면 그 중요한 회의가 있어. 이번에 기회를 잡지 못하면, 정말 끝일지도 몰라. 그동안 내가 공들여왔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까 봐 두려워.”

달은 미나의 무릎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더니,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자장가처럼 미나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두려움은 때로는 너를 가두는 철창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너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바람이 되기도 한단다.” 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나직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연못만큼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너의 두려움은 지금 어느 쪽이니?”

미나는 달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짓누르던 것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그것이 지금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철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철창을 부수고 나가야만 한다는 강렬한 열망 또한 그 안에 있었다.

“철창 같아.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 미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달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철창은 바깥에서 잠글 수도 있지만, 안에서도 잠글 수 있지. 네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잘 보렴. 혹시 네 스스로 그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것은 아니니?”

그 말에 미나는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문을 닫아걸었다고? 그녀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달은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의 노력 뒤에 숨겨진, 어쩌면 실패를 예상하고 스스로에게 합리화하려던 나약한 마음을.

“내가… 내가 그랬을까?” 미나의 목소리에는 뒤늦게 깨달은 회한이 묻어났다.

“아니, 네가 그랬다는 것이 아니야.” 달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저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주라는 것이지. 너는 수많은 계절을 견뎌내고 이 자리까지 왔잖니. 처음 내가 너의 문을 두드렸던 그 밤을 기억하니? 너는 그때도 지금처럼 지쳐 있었지만, 작은 손을 내밀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지. 너의 안에는 어떤 폭풍우도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함이 숨어 있단다.”

미나의 눈앞에 첫 만남의 밤이 스쳐 지나갔다. 비에 젖어 떨고 있던 작은 그림자. 그리고 망설임 끝에 자신을 향해 열었던 문. 그때의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어리고, 세상의 상처에 서툴렀지만, 동시에 작은 생명 하나를 품을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너무 변해버린 걸까?”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를 아는 것이지. 너의 중심은 여전히 따뜻하고 단단해. 다만 지금은 그 따뜻함이 외부의 차가움에 잠시 가려진 것뿐이야.”

달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미나는 달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으니, 마음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달은 조용히 미나의 품에 안겨 가르랑거렸다. 그들의 대화는 비단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존재 그 자체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있었다.

“고마워, 달아.”

미나는 달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때, 달은 고개를 들더니 창밖을 응시했다. 밤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저 멀리 동쪽 지평선 너머에서 아주 희미한, 새벽의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달의 푸른 눈동자가 그 희미한 빛을 좇았다.

“어떤 바람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한단다.” 달은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였다. “두려워 말고, 네 마음의 문을 열어두렴. 때로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미나는 달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달이 말하는 ‘손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달이 자신에게 전하는 조언과 위로를 마음에 새길 뿐이었다. 따뜻한 달의 온기가 그녀의 품에 스며들었고, 밤은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내일의 중요한 회의가 여전히 부담으로 남아있었지만, 미나의 마음속에는 이제 작은 씨앗 하나가 심긴 듯했다. 달이 심어준 용기와 희망의 씨앗이었다. 미나는 이 작은 씨앗이 어떤 꽃을 피울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더 크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달은, 미나의 품에서 고요히 잠든 척하며, 멀리서 다가오는 아주 작은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발소리인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