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 – 제504화

겨울의 문턱, 새벽안개가 자욱한 서울 변두리 동네의 오래된 골목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나지막한 기와지붕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댄 채 지난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은수 할머니의 집은 유난히 더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할머니는 창밖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회색빛을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 있었다. 온기를 잃은 손끝이 저절로 거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피아노 건반을 향했다. 흑단과 상아로 이루어진 건반들은 먼지 한 겹을 머금은 채, 수많은 이야기들을 침묵 속에 품고 있는 듯했다. 오래 전, 이 피아노는 이 집의 심장이었다. 웃음과 눈물, 사랑과 이별,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선율이 끝없이 흘러나왔던 마법의 상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덩치 큰 유물일 뿐이었다. 할머니의 마음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슬픔처럼, 피아노 역시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다. 손주 지호가 가끔 건반을 두드리며 서툰 연주를 시도하곤 했지만, 할머니는 그때마다 애써 외면했다. 소리가 나면,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할머니, 또 그렇게 앉아 계세요?”

어느새 부엌에서 라면 끓는 냄새와 함께 지호가 나타났다. 후드티에 낡은 청바지 차림의 그는 열아홉 살 특유의 풋풋함과 싱그러움을 품고 있었다. 지호는 할머니 옆에 다가앉아 무릎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할머니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괜찮다, 지호야. 새벽 공기가 좋아서 그만.”

할머니는 애써 미소 지었지만, 지호는 그녀의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는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 이유를 지호는 알고 있었다.

탁자 위, 붉은색 글씨로 인쇄된 ‘재개발사업 주민설명회 개최 안내’ 공문이 낡은 안경집 옆에 놓여 있었다. 오래된 동네를 허물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를 짓겠다는 통보. 이 동네 모든 이들의 숙명과도 같은 흐름이었지만, 할머니에게는 평생을 지켜온 세계가 무너지는 통보와 같았다. 그리고 그 세계의 가장 중심에는, 낡은 피아노가 서 있었다.

“할머니, 점심 드셔야죠. 제가 끓인 라면은 진짜 맛있어요!”

지호는 억지로라도 할머니의 기분을 전환시키려 애썼다. 부드러운 손길로 할머니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따뜻한 라면 국물에 온기가 퍼지는 동안, 지호는 조용히 피아노를 바라봤다. 피아노는 마치 집안의 가장 큰 가족 구성원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호는 어릴 적, 할아버지의 넓은 등 뒤에서 이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 피아노는 단순히 악기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숨결이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 이야기였으며, 지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집을 지켜온 파수꾼이었다.

오후가 되자, 예고된 손님이 찾아왔다. 검은색 세단에서 내린 강 이사는 날카로운 양복 차림에 냉철한 눈빛을 지닌 남자였다. 그의 등 뒤에는 서류철을 든 비서들이 그림자처럼 따랐다. 강 이사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피아노를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어떤 감상도, 존중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처리해야 할 낡은 물건을 평가하는 듯했다.

“은수 할머님 되시죠? 재개발추진위원회 강 이사입니다. 어르신께서 아직 서류 제출을 망설이신다고 해서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강 이사는 친절한 미소 뒤에 날카로운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그가 내민 서류에는 보상금액과 이주 계획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지호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집을 팔 수 없습니다. 이 피아노도요.”

“어르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보상금도 시세보다 훨씬 좋게 책정해 드렸고, 아파트로 이사 가시면 훨씬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습니다. 낡은 집에서 언제까지 불편하게 지내실 건가요?”

강 이사의 목소리에는 설득보다는 압박의 기운이 짙었다. 그는 피아노를 다시 한 번 가리켰다.

“이런 오래된 피아노는 폐기 처분도 쉽지 않습니다. 옮기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테고요.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의 말은 피아노를 그저 쓰레기처럼 취급하는 듯했다. 할머니의 눈빛에 분노가 스쳤다. 지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 피아노는 단순한 낡은 물건이 아니에요!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지호야.”

할머니가 지호를 말렸다. 그녀는 강 이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주름진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떠올랐다.

“강 이사님. 이 집은 제 남편과의 추억이 서린 곳이고, 이 피아노는 저희 삶의 모든 노래를 담고 있습니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 이사는 피식 웃었다. 그에게는 감상적인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어르신, 현실을 직시하셔야죠. 다음 주까지는 최종 결정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적인 절차로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훨씬 복잡해질 겁니다.”

그는 차갑게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집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은 냉정하고 무자비했다. 지호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쥐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는 오랜 세월의 지침과 포기할 수 없는 강인함이 뒤섞여 있었다.

지호는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눈물이 맺힌 할머니의 눈을 보며, 지호는 문득 피아노로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모르게 달라 보이는 피아노였다. 강 이사의 차가운 시선이 닿았던 건반 중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틀어져 있는 것을 지호는 발견했다. 다른 건반보다 아주 살짝 내려앉아 있었다. 궁금증이 발동한 지호는 조심스럽게 그 건반을 눌러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건반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고, 무언가에 걸린 듯 미세한 틈이 생겼다.

그 틈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보니, 딱딱한 종이 같은 것이 만져졌다. 지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냈다. 낡고 바랜, 노란색 악보였다. 손때 묻은 악보의 모서리에는 할아버지의 필체로 보이는 글씨가 희미하게 쓰여 있었다. ‘나의 은수에게 – 우리의 첫 번째 춤을 추었던 그 날의 노래’.

악보의 첫 음표는 왈츠의 경쾌한 리듬을 담고 있었다. 할머니는 지호의 손에 들린 악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처음 만나 함께 춤을 추었던,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곡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지냈던, 그러나 단 한 번도 마음속에서 사라진 적 없었던 멜로디였다.

지호는 떨리는 손으로 피아노 건반 위에 악보를 펼쳤다. 그는 악보를 읽을 줄은 몰랐지만, 어릴 적 할아버지가 이 곡을 연주할 때면 늘 옆에서 따라 부르곤 했다. 멜로디는 그의 심장 속에 새겨져 있었다. 서툰 손가락으로 건반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둔탁하고 불협화음이 섞인 소리였지만, 곧 기억 속의 선율이 되살아났다. 삐걱거리던 피아노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투박하지만 깊은 울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지호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피아노 가까이 다가와 지호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잊었던 기억, 잃었던 사랑이 피아노의 노래와 함께 되살아나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지호는 할머니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손가락은 점점 더 확신에 차서 움직였다. 멜로디는 투박했으나, 그 속에는 이 집의 역사가, 할아버지의 사랑이, 그리고 할머니의 모든 삶이 담겨 있었다. 피아노는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낡은 건반 하나하나가, 지난 세월의 아픔과 환희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때, 닫혀 있던 대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 이사의 차는 이미 떠났을 터였다.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피아노의 선율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이 오래된 집의 문을 넘어 바깥세상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낡은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는, 이제 단지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피아노에 손을 얹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 피아노는… 이 집은 팔 수 없어.”

노래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은, 더 큰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