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의 귓가에 차가운 바람 소리가 스쳤다. 창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가느다란 눈발은 쉬지 않고 내려앉아 세상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듯했다. 희미한 오후의 햇살이 구름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도 이내 자취를 감추는, 그런 흐린 겨울날이었다. 병실 안은 창밖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따뜻했지만, 은서의 마음속은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 겨울일까. 숱한 계절이 바뀌고 세상의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그날의 약속은 낡은 사진처럼 은서의 가슴 한구석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겨울날, 붉게 상기된 두 뺨을 비비며 까르르 웃던 현우의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웃음은 이제 병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잠들어 있는 그의 창백한 얼굴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그날의 흔적
“은서야, 봐! 세상이 온통 우리 둘만의 새하얀 도화지가 됐어!”
까만 코트를 입은 작은 현우가 눈밭 위를 깡총깡총 뛰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것에 신이 난 아이는 눈밭에 길게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며 달려갔다. 열 살의 은서는 현우의 뒤를 쫓아 뛰어가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찬 눈이 엉덩이에 닿았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현우는 달려와 은서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나처럼 조심조심 걸어야지.”
현우는 으스대며 손을 잡은 채 걸었다. 그들의 발자국은 눈밭에 길게 이어졌다. 한참을 걷던 현우는 작은 오솔길 끝에 멈춰 섰다.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가지 끝에 매달린 눈송이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현우는 팔을 벌려 그 눈꽃을 안으려는 듯 하늘을 향해 외쳤다.
“약속하자! 이 눈꽃처럼 아름다운 세상, 우리 둘이 꼭 지켜주자. 그리고 이 세상이 아무리 추워져도, 우리 마음만은 늘 따뜻하게,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은서는 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작은 손을 맞잡고, 세상의 가장 따뜻한 약속을 가슴에 새겼다. 그 순간, 눈꽃 하나가 은서의 속눈썹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차가웠지만 녹아내리는 순간, 왠지 모르게 따뜻한 기운이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 약속은 두 아이의 순수한 영혼에 잊히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졌다.
지금, 은서는 병실 창가에 앉아 눈 감은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른 살의 그는 여전히 순수한 얼굴이었지만,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가슴을 오르내리는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그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차가운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병실을 채웠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 그 약속의 무게가 은서의 어깨를 짓눌렀다. 현우가 이렇게 힘없이 쓰러지고 나서야, 은서는 그 약속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흩날리는 희망
방금 전 담당 의사가 다녀갔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은서의 귀에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아득하게 울렸다. “기적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은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기적이라는 단어는 희망을 주면서도, 동시에 절망의 깊이를 알리는 차가운 칼날 같았다. 그녀는 병실 문을 나서는 의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우의 침대 곁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는 낡은 나무 조각품이 있었다. 현우가 어릴 적 조각했던 눈꽃 모양의 나무 조각이었다.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닳았지만, 여전히 그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은서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나무 조각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이 조각품은 그날의 약속을 상징하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증표였다. 현우는 매년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조각품을 꺼내들며 은서에게 속삭이곤 했다. “우리의 약속은 이 눈꽃처럼 영원히 시들지 않을 거야.”
은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나무 조각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톡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조각품을 가슴에 안고 현우의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희미한 숨소리를 내는 그를 바라보며, 은서는 지난 세월을 되짚었다. 함께 웃고 울었던 수많은 순간들,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그녀는 혼자였다. 홀로 그 약속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고독한 길 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현우의 마지막까지 그녀가 약속을 지키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나무 눈꽃 조각이 다시금 차갑게 느껴졌다. 아니,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현우의 온기가 스며들어 있는 듯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 현우가 깨어나지 못한다 해도, 이 약속은 영원히 그녀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쉴 것이었다. 현우의 몫까지, 그녀는 이 약속을 지켜나가야만 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로 젖어 있던 얼굴은 이제 굳건한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현우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미한 온기에도 가슴이 저릿했다. “현우야,”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분명했다.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절대 포기하지 않아. 우리 약속, 내가 지킬게. 이 눈꽃처럼, 영원히.”
그녀는 병실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창밖은 여전히 눈으로 가득했다. 새하얀 눈은 모든 것을 덮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수함도 담고 있었다. 눈은 조용히 내리며 세상을 덮고, 차가운 공기는 그녀의 굳은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심장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뜨겁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들의 약속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서의 삶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었다.
은서는 현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창밖의 눈송이들이 끝없이 춤추듯 내려앉는 가운데, 그녀는 알 수 없는 희망의 빛을 보았다. 작은 눈꽃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눈밭을 이루듯이, 그녀의 작은 희망들이 모여 언젠가 기적을 만들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차가운 겨울밤은 깊어지고 있었지만, 은서의 가슴속에는 그날의 눈꽃처럼 시들지 않는 약속의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기적은, 그녀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