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519화

밤은 짙게 깔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퇴근하는 차량들의 붉은 미등이 길게 이어졌고, 사무실 안은 탁상 스탠드의 오렌지빛 불빛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지훈은 낡은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손에는 방금 도착한 메일 한 통이 인쇄된 종이가 들려 있었다. 발신인은 신원을 밝히지 않았지만, 제보 내용은 심장을 꿰뚫을 만큼 직설적이었다.

“제주 서귀포, ‘바람의 언덕’ 카페. 그 여자, 분명히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이에요.”

지훈의 손에 들린 종이에는 흐릿한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멀리서 찍힌 탓에 선명하지 않았지만, 사진 속 여인의 옆모습은 그의 기억 속에 각인된 소라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 가녀린 목선, 그리고 창밖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까지. 지난 수백 번의 헛된 추적과 실망 속에서도, 지훈의 심장은 사진 한 장만으로 다시 뜨겁게 요동쳤다. 이런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희망과 절망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흔들리는 기분.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간절한 기도가 목구멍에 걸렸다.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제주행 티켓을 끊었다. 519번째 시도.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허상

제주는 새벽부터 맑았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바다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렌터카를 몰아 서귀포를 향하는 동안, 지훈은 차창 밖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수많은 해안도로를 달리고, 수많은 카페에 들렀다. 매번 어렴풋한 기대와 그에 상응하는 깊은 실망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그럴까? 아니, 이번만은 달라야 한다.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바람의 언덕’ 카페는 해안도로 끝자락, 이름 그대로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카페 안에서는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훈은 멀찍이 차를 세우고,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셔터를 눌렀다. 카페 안을 향해 렌즈를 조절하자, 사진 속 여인과 흡사한 모습의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순간, 지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녀의 머리칼은 바람에 실려 부드럽게 흔들렸고, 햇빛을 받은 옆모습은 그의 기억 속 소라와 너무나도 일치했다.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모습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한 환영이었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가갈 시간이었다.

지훈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커피 향이 감돌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테이블로 향했다. 몇 걸음 남겨두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을 등지고 있던 얼굴이 정면으로 향했다. 순간, 지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 콧날, 입술. 분명 소라와 닮았지만, 결정적으로 달랐다. 소라 특유의 눈웃음도, 미간에 자리 잡던 작은 점도 없었다.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머릿속에서 모든 희망의 불꽃이 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여인은 지훈을 보고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세요? 주문은 저쪽에서 하셔야….”

그녀의 목소리마저 소라와는 달랐다. 차분하고 부드러웠지만, 소라의 맑고 경쾌한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얼굴 근육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그는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심장은 납덩이처럼 가라앉았다. 푸른 바다도, 따뜻한 햇살도, 이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또다시, 헛된 희망에 속았다. 지훈은 렌터카에 몸을 싣고,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감자, 여전히 선명한 소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 속 소라는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차가운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작은 흔적, 희미한 등불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포기해야 할까. 이 지독한 집착을 멈춰야 할 때가 온 걸까. 십수 년간 이어진 그의 삶의 이유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 문득 카페 안에서 보았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여인의 테이블 한쪽에는 작은 나무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정교하게 깎인 작은 새 모양이었다. 그 조각상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다. 소라가 어릴 적부터 유독 좋아했던, 특정 지역의 장인이 만드는 조각상과 흡사했다. 소라는 그 조각상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고, 심지어 직접 조각칼을 들고 흉내 내기도 했었다. 단순한 우연일까?

지훈은 다시 눈을 떴다. 절망의 그림자 속에서, 희미한 등불 하나가 켜지는 듯했다. 조각상을 놓아둔 것이 그 여인 본인의 취향이었을까, 아니면 카페의 주인이 그 조각상을 좋아했을까? 만약 이 카페의 주인이 소라가 좋아했던 그 특유의 나무 조각상을 진열해두었다면, 그에게는 새로운 실마리가 될 수 있었다. 더 이상 얼굴이 닮은 사람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소라의 ‘취향’과 ‘흔적’을 쫓는 것. 어쩌면 그는 지난 세월 동안 껍데기만을 쫓아 헤맸던 것이 아닐까.

그는 다시 차에서 내렸다. 카페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희망보다는 미련에 가까운, 그러나 놓을 수 없는 끈질긴 집념이었다. 그는 카페에 들어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방금 그 여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는 커피를 주문하고, 슬쩍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카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활짝 웃으며 손님을 맞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였던 나무 조각상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그는 커피가 나오자 조심스럽게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죄송한데요. 테이블에 놓인 저 나무 조각상… 혹시 어디서 사신 건가요? 제가 아는 분이 저런 종류의 조각상을 좋아해서요.”

주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 이거요? 제주 동쪽에 사는 작은 공방에서 만드는 거예요. 솜씨가 좋아서 저희 카페에도 몇 점 놓아두는데, 손님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제 딸아이가 어릴 적부터 저런 걸 유독 좋아해서, 제가 매번 가서 사 오곤 했죠.”

딸아이.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주인의 딸이 좋아한다는 조각상. 그리고 방금 전 그 여인이 앉았던 자리.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소라의 취향과 일치했다. 그 여인이 이 카페 주인의 딸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아니, 설령 그 여인이 소라가 아니더라도, 소라의 흔적을 아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지훈은 커피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519번의 실패 속에서 찾아낸, 어쩌면 가장 의미 있는 실마리일지도 몰랐다. 그는 더 이상 눈앞의 그림자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녀의 발자취가 남긴 작은 조각들을 모으는 데 집중할 차례였다. 그는 다시 한번 제주 동쪽의 공방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곳에 소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곳에는 소라의 ‘흔적’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흔적들이 언젠가 그녀에게로 이끄는 길이 될 것이라고, 지훈은 믿었다. 그의 눈빛에는 지쳐 보이는 피로감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끈질긴 탐정의 불꽃이 다시금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