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524화

차가운 겨울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그러나 분명히 그 끝을 알리는 3월의 강변은 희미한 활기로 가득했다. 아직은 여윈 가지들이 앙상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끝마다 연두색의 여린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 채비를 하고 있었고, 흙 내음과 함께 풀 비린내가 섞인 싱그러운 봄바람이 강물을 간지럽히며 불어왔다. 이지혜는 낡은 벤치에 앉아 그 모든 생명의 기척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겨울 강물처럼 깊고 차가웠다. 계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녀의 마음속 겨울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 듯했다.

수년 전,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동생, 진우. 그 이름은 이제 그녀의 심장에 박힌 영원한 얼음 조각 같았다. 매년 봄이 올 때마다,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기운 속에서 지혜는 더욱 깊은 상실감에 잠기곤 했다. 봄바람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식들을 가져왔지만, 그녀에게는 언제나 진우가 돌아올 것이라는, 그러나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덧없는 희망만을 속삭이는 잔인한 메아리 같았다.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강 건너편의 도시 풍경은 뿌연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빛났다. 지혜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작은 조약돌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진우와 함께 강가에서 주웠던 수많은 조약돌 중 하나. 그때 진우는 이 조약돌을 보물처럼 아끼며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성을 쌓을 거라 했었다. 그 약속은, 그 모든 꿈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지혜 아가씨, 또 여기 앉아 있었구먼.”

나직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지혜의 귓가를 스쳤다. 고개를 돌리자, 허리가 굽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한 박 순옥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매일 이 강변을 찾아 산책을 하셨고, 몇 년 전부터 지혜를 이곳에서 자주 마주치며 말없는 위로를 건네곤 했다. 할머니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지혜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머니는 지혜 옆에 천천히 앉으셨다. 봄바람이 할머니의 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바람이 더 따뜻하네. 이젠 정말 봄이 오려나 봐.”

할머니의 말에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의 냉기는 가시지 않았다. 할머니는 지혜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내 강 건너편의 오래된 집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중 한 집은 유난히 낡고 황량했다. 강변을 따라 한참 걸어가야 겨우 닿을 법한 곳에 자리한,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이었다.

“저 집이… 얼마 전 주인이 바뀌었더구나. 오랫동안 비어있던 곳인데, 젊은 사람이 새로 들어와서 손을 보고 있어.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다고 하더군.”

할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시며, 보따리 속에서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는 세월의 흔적으로 색이 바래고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지혜는 무심코 그 상자를 바라보다가, 순간 숨을 헙 들이켰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 아련한 기억의 파편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이건…?”

“그 집 주인이 마당 한구석, 잡초 속에 파묻힌 돌 틈에서 발견했대. 흙먼지를 털어내니 이런 것이 나오더라는구나.”

할머니는 상자를 지혜에게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받아든 지혜는 낡은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서는 쿰쿰한 흙냄새와 함께, 희미한 나무 향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몇 가지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진우의 모습이 흐릿하게 담겨 있었다. 진우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낯선 중년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사진의 가장자리가 불에 그을려 손상되어 있어 얼굴은커녕 정확한 체형조차 알 수 없었다. 지혜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몇 장의 종이가 접혀 있었다. 단순한 종이 그림 같았다. 어린아이의 서툰 솜씨로 그려진 강변의 풍경, 나무, 그리고 어떤 표식. 그리고 그 그림들 사이, 바닥에 깔려있던 작은 천 조각. 그것은 닳고 닳아 형태가 흐릿했지만, 지혜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진우가 어릴 적부터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작은 복주머니였다. 자신이 직접 수놓아 준 것이었다. 지혜는 그것이 진우와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복주머니를 움켜쥔 지혜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이건… 진우의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강 건너편의 낡은 집에…?

“아가씨가 예전에 그 집 근처에서 동생을 찾던 걸 내가 몇 번 본 적이 있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와 본 건데… 아가씨 동생 물건이 맞나 보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지혜에게는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지혜는 상자 안의 물건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림, 사진, 복주머니. 그리고 문득, 상자의 안쪽 바닥에 새겨진 희미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작고 닳아서 언뜻 보면 나무결의 일부처럼 보였던 글귀였다. 지혜는 상자를 햇빛에 비춰 조심스럽게 글씨를 읽어내려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

‘북쪽 개울가, 아홉 번째 돌.’

그것은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도착한 암호와도 같았다. 북쪽 개울가. 그곳은 지혜와 진우가 어릴 적 자주 뛰어놀던 작은 개울이었다. 그리고 ‘아홉 번째 돌’이라니.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새로운 주인이 발견했다는 이 상자가, 진우가 사라진 지 15년 만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지혜는 손에 들린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단순한 유물이 아닌,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과,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차가웠던 마음에 일렁이는 불씨가 지펴지는 듯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희망’이라는 감각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잠자던 씨앗이 봄바람을 맞아 터져 나오려는 것처럼, 생경하면서도 강렬했다.

“봄바람은… 잠자던 씨앗을 깨우는 법이지. 어쩌면 너의 마음속에도… 새로운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겠구나.”

할머니의 말이 지혜의 귓가에 다시 한번 울렸다. 지혜는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눈빛에는 깊은 이해와 연민, 그리고 조용한 격려가 담겨 있었다. 강 건너편 낡은 집에서, 봄바람이 실어다 준 이 작고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15년간 굳게 닫혀 있던 지혜의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들고 있었다.

지혜는 상자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오래된 나무의 감촉이, 마치 진우의 손을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멍하니 강물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봄, 봄바람이 전해준 이 작고도 거대한 소식은, 그녀를 다시 움직이게 할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북쪽 개울가, 아홉 번째 돌. 지혜는 강 건너 북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진우의 흔적이, 혹은 진실의 실마리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이, 얼어붙었던 그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