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조용한 방 안, 하루는 낡은 금속성 펜던트를 손에 쥐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최근에야 기억의 파편들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른 유일한 단서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 펜던트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이 반짝였다. 잊혀진 과거의 잔재가 어렴풋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오는 듯했다.
“세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메아리 없는 허공에 흩어졌다. 펜던트가 보여준 환영 속의 얼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여인의 모습은 하루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왜 그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기억을 잃기 전, 그는 무엇을 하려 했던 걸까. 수많은 질문들이 가시 돋친 덩굴처럼 그의 심장을 휘감았다.
최근 들어 조금씩 회복된 기억들은 조각난 퍼즐과 같았다. 파편들은 강렬했지만, 전체 그림을 완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과거의 자신은 분명히 어떤 중대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을 터. 그리고 그 임무는 그의 기억 상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혹은… 그의 기억 상실 자체가 임무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설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루는 펜던트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속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단순히 시간의 흔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스쳤다. 그는 조심스럽게 펜던트의 측면을 더듬었다. 닳고 닳은 표면 위에서 미세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했다. 손톱으로 살짝 눌러보자,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펜던트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 안에는 예상치 못한 것이 들어 있었다.
아주 작은 홀로그램 프로젝터였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장치는 펜던트의 은밀한 공간에 완벽하게 숨겨져 있었다. 하루는 조심스럽게 프로젝터를 꺼내 들었다. 전원을 켜자,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더니 공중에 작고 일그러진 이미지를 띄웠다. 그것은 어떤 건물, 혹은 거대한 구조물의 설계도 같았다. 중앙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잊혀진 과거가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하루를 압도했다.
“이건…”
이미지는 계속해서 변했다. 설계도의 한 부분, 그리고 또 다른 알 수 없는 기호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좌표였다. 현재 그가 있는 시간대와 동떨어진 듯한, 아주 오래된 공간의 좌표였다. ‘과거의 나’가 남긴 메시지일까. 아니면, ‘과거의 나’가 쫓고 있던 대상의 위치일까.
하루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은 그 어떤 논리적인 의심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낡은 시공간 이동 장치를 챙기고, 좌표를 입력했다. 미지의 과거, 혹은 잊혀진 공간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푸른빛이 방을 가득 채우고, 하루는 그 속으로 발을 디뎠다. 몸이 찢어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모든 것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
착지한 곳은 황량하고 고요한 폐허였다.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들이 녹슨 철골을 드러낸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마치 거인이 난장판을 벌인 후 버려진 장난감 도시 같았다. 과거의 영광이 퇴색된 채,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공기는 텁텁했고, 흙먼지가 바람에 실려 흩날렸다.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가리키던 건물은 이 폐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거대한 철문은 녹슬어 있었고, 그 옆에는 거의 지워진 글자들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하루는 펜던트 속 설계도와 비교하며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왔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유적 같았다.
어두운 내부를 따라 걷자,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한 복도가 나타났다. 희미한 비상등만이 간간히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프로젝터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거의 자신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길고 긴 복도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또 하나 나타났다. 이번에는 펜던트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문양을 따라 펜던트를 가져다 댔다. 문양에 파란빛이 돌더니,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철문 너머에는 텅 빈 원형의 방이 나타났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데이터 터미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지만, 주변의 케이블들은 복잡하게 얽혀 벽면으로 이어져 있었다. 하루는 터미널 앞에 섰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삐’ 하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오래된 운영체제의 부팅 화면이 나타났다. 그리고 곧, 깜빡이는 커서와 함께 로그인 화면이 떠올랐다.
비밀번호를 알 수 없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과거의 자신이 어떤 비밀번호를 사용했을까. 세아? 아니면 어떤 날짜? 그는 무심코 펜던트의 문양을 떠올렸다. 문양의 패턴을 숫자와 알파벳으로 변환해보았다. 입력하자, 화면의 커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녹색 글씨가 나타났다.
“접근 허가.”
수많은 데이터 파일들이 화면에 목록으로 나타났다. 파일들은 암호화되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상단에 있는 파일은 ‘긴급’이라는 제목과 함께 암호화가 풀려 있었다. 하루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클릭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영상 기록이었다. 흐릿한 영상 속에서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낯설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하루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고통과 결의로 가득했다. 바로 ‘과거의 하루’ 자신이었다.
“만약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 잘 도착했기를 바란다, 나 자신아.” 과거의 하루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또렷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이 모든 기억을 지운 것은… 너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하루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의 기억 상실은 사고가 아니었다. 의도된 행위였다. 과거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시간을 교란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거를 바꾸고, 미래를 조작하려 했다. 내가 쫓던 그들은… 그들의 우두머리는 바로 우리의 내부, 시간 관리국의 핵심부에 침투해 있었다.”
충격적인 고백에 하루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는 시간 관리국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적이 있었다. 내부의 적.
“그들의 목적은… 모든 시간대의 ‘특이점’을 찾아 파괴하는 것이다. 세아는… 그녀는 가장 중요한 특이점 중 하나였다. 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수단을 택했다. 나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나의 흔적을 감췄다. 그리고 이 정보를, 너에게 남겼다.”
영상 속의 과거 하루는 손을 떨며 터미널 화면을 가리켰다. “이 터미널에는 그들이 찾으려 했던 특이점들의 정보와, 그들의 계획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도. 하지만… 너는 절대 이 정보를 ‘그들’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너를 찾고 있을 것이다. 네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들은 너를 없애려 할 것이다.”
과거의 하루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너에게 모든 짐을 지우게 해서… 하지만, 너만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우리의 미래를 지켜줘, 하루.”
영상이 끝났다. 화면은 다시 로그인 화면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기억 상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으며, 그가 사랑했던 세아는 ‘특이점’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를 쫓는 적이 내부의 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믿을 수 없는 배신감과 함께 거대한 음모의 그림자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서둘러 터미널의 다른 파일들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방 안의 희미한 비상등이 깜빡이더니 완전히 꺼져버렸다. 완전한 암흑이 하루를 집어삼켰다. 동시에,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금속이 바닥에 끌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하루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벌써 그를 찾아낸 것인가? 이토록 빨리? 아니면, 그들은 이미 이곳에 와 있었고, 그가 이곳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터미널의 꺼진 화면에서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과거의 하루가 말했던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들은 너를 찾고 있을 것이다. 네가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들은 너를 없애려 할 것이다.’
그 순간, 방 안의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기계적인 움직임과 함께 차가운 금속음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하루는 숨을 멈췄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그는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눈앞의 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는 지금, 과거의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자신이 그를 위해 남겨둔 마지막 싸움의 장에 도착한 것일까?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금속음이 바로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등 뒤로, 섬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 이곳까지 왔군, 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