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의 잔재가 물러나고, 연분홍빛 기운이 대지 위에 가득 드리우기 시작했다. 강가에 자리한 고즈넉한 마을, 작은 물레방아는 해빙된 물줄기를 받아 다시금 힘찬 소리를 내며 돌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기와지붕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이화연 할머니의 옹기 가마터는 그런 봄의 정취 속에서도 왠지 모를 깊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칠십 평생 흙을 빚어온 화연 할머니는 굽은 허리로나마 가마 앞에 앉아 불씨를 살피고 있었다. 봄바람은 이미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마음속 겨울은 좀처럼 녹을 줄 몰랐다. 매년 이맘때면 할머니는 늘 같은 기억에 잠기곤 했다. 샛노란 꽃잎이 흐드러지던 그 봄날, 그녀의 전부였던 어린 딸 은채를 잃었던 그날의 기억. 봄은 할머니에게 언제나 희망이 아닌, 쓰라린 상실의 계절이었다.
손주 민준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할머니, 날이 많이 풀렸어요. 이제 작업하기 좋으시죠?” 민준은 할머니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옹기 일을 배우는 스무 살 청년이었다. 그는 할머니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화연 할머니는 민준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 잿빛 눈동자는 여전히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봄바람이 불면… 꼭 어미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민준은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마른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온기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낯선 손님의 발자국
그날 오후, 예상치 못한 손님이 가마터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왔다. 구부정한 허리에 흰 머리가 성성한 노파였다. 마을에서는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화연 할머니는 낯선 노파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노파는 한참 동안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화연… 맞으시지요?” 노파의 목소리는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조심스러웠다.
화연 할머니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신지?”
노파는 자신의 이름이 수연이라고 했다. 그리고 몇십 년 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잠시 인연을 맺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화연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도 흐릿하게나마 수연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당시 고아원에서 잠시 봉사활동을 했던 어린 수연의 얼굴이었다. 순간, 할머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수연은 그 어떤 이름보다 은채의 기억과 가까운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수연은 주머니에서 낡고 해진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오색 실로 얼기설기 수놓아진 꽃무늬가 선명했다. 화연 할머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바로 은채가 가장 아끼던, 할머니가 직접 수놓아 만들어주었던 작은 주머니였다.
“이것은… 이것은 은채의 것인데…”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주머니를 향해 뻗어졌다.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 시간 숨겨온 죄책감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봄바람이 전한 충격적인 소식
“할머니… 은채는… 살아 있었습니다.”
수연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화연 할머니의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 살아 있었다니? 죽었다고, 물살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그렇게 믿고 살아온 반평생이었다. 그 상실감 때문에 그녀는 수많은 밤을 울었고, 봄이 올 때마다 가슴을 저몄다. 그런데 살아 있었다니?
화연 할머니는 충격으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민준이 급히 달려와 할머니를 부축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할머니는 민준의 손을 뿌리치고 수연을 향해 격렬하게 소리쳤다. “무슨 소리냐! 살아있었다니! 그때… 그때 분명히… 다들 죽었다고 했는데!”
수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제가 너무 어려서, 무서워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은채는 그때 강물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았습니다. 다른 어른들이 발견해서 구조했어요.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가족을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국 먼 나라로 입양 보내졌습니다.”
은채가 발견되어 구조되었지만, 고아원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후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이야기. 당시 어린 수연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어른들의 압력과 자신의 어린 나이에 공포심이 앞서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평생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왔다고 털어놓았다. 수십 년이 흘러, 죽음이 가까워지자 더 이상 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화연 할머니의 가슴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희망으로 뒤엉켰다. 딸이 살아 있었다니.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니.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딸의 죽음을 애도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잃어버린 세월의 무게가 할머니의 어깨를 짓눌렀다. 수연은 떨리는 손으로 낡은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는 은채의 입양 기록 일부와 해외기관의 이름, 그리고 마지막으로 확인된 주소지가 적혀 있었다.
다시 피어나는 희망
밤이 깊어지고, 가마터에는 장작 타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화연 할머니는 멍하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준은 할머니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낮에 들었던 이야기는 민준에게도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할머니에게 그렇게 깊은 슬픔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슬픔이 사실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는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연 할머니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은채의 입양 기록이 담긴 낡은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세월의 흐름 속에 흐릿해진 글씨들이 할머니의 눈에는 또렷이 들어왔다. 은채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굳게 닫혔던 할머니의 마음속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했다. 가슴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었던 슬픔의 강물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는 작은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두렵고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반평생을 넘게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살았는데, 이제 와서 그녀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다니. 이것은 축복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까.
할머니는 봉투 속 기록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이름이… 김은채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리’라고 바뀌었구나…” 할머니의 눈가에 뜨거운 물방울이 맺혔다. 잃어버린 딸의 이름이 낯선 글자로 변해버린 현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봄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의 촛불을 흔들었다. 그 흔들림 속에서, 화연 할머니는 결심한 듯 몸을 바로 세웠다. 그녀의 눈빛에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민준아… 할미가… 할미가 은채를 찾아야겠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그 속에는 결연한 울림이 있었다. 민준은 할머니의 결심에 감격한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할머니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다. “네, 할머니. 제가 꼭 도와드릴게요. 우리 같이 은채 고모를 찾아요.”
봄바람은 이제 슬픔만을 싣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가장 충격적이고도 희망찬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 화연 할머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그 별빛 사이로, 어쩌면 저 멀리 어딘가에서 딸 은채도 같은 밤하늘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할머니의 가슴은 다시금 뜨거워졌다. 길고 지난한 여정이 될 것임을 알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그렇게, 잊힌 희망의 씨앗을 할머니의 마음에 다시 심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