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134화

미로 속 그림자

한지훈은 낡은 종이 지도 위에 희미하게 연필로 표시된 주소를 짚었다. 손때 묻은 지도의 모서리는 그의 긴 여정을 말해주듯 너덜너덜했다. 도시의 변두리, 재개발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채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 그곳에 그의 첫사랑, 이은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익명의 제보가 도착한 것은 불과 어제저녁이었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듯한 작은 갤러리 ‘고요의 뜰’. 간판조차 없이, 다만 흑갈색 나무 문 위에 덧대어진 녹슨 철제 손잡이만이 이곳이 평범한 주택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지훈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134번째의 이정표. 수없이 발걸음을 돌렸던 허무한 시도 끝에, 이번만큼은 왠지 모르게 달랐다. 희망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실례합니다.”

나무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차분한 예술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빛은 실내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고, 창문 너머의 작은 마당에서 드리워진 그림자가 갤러리 벽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벽에는 추상화와 풍경화, 그리고 조형물들이 듬성듬성 걸려 있었다. 작가들의 이름은 낯설었으나, 그들의 작품 속에는 고유한 고독과 열정이 스며 있었다.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훈은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며 갤러리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눈은 작품 하나하나를 훑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은서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녀가 혹시 이곳에서 작품을 전시했을까, 혹은 이곳에서 일하고 있을까. 온갖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서 오세요. 어떤 작품을 찾으시는지요?”

안쪽 방에서 중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안경 너머의 형형한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예리했다. 그녀는 이곳의 관장인 최명희였다.

“아, 안녕하세요.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다 들렀습니다. 혹시… 이 갤러리에 ‘이은서’라는 이름의 작가가 활동한 적이 있습니까?” 지훈은 망설임 없이 물었다. 더 이상 돌려 말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최 관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녀는 지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은서 작가요? 음… 그 이름은 좀 낯선데요.”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지훈의 질문에 담긴 간절함을 읽어내려는 듯, 잠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훈은 그녀의 반응에서 무언가 숨겨진 것을 감지했다.

“혹시 이전에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특히 자연을 모티브로 한….” 지훈은 은서의 작품 특징을 설명하려 애썼다.

최 관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가장 안쪽 벽에 걸린 그림을 향해 손짓했다. “이 그림은 어떻습니까? ‘길 잃은 새의 노래’라는 제목인데, 신인 작가 ‘서연’ 씨의 작품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해서, 전시회 때도 대리인을 보냈습니다만… 묘하게 이 작가의 그림에는 깊은 사연이 담겨 있는 듯해요.”

지훈의 시선이 그녀가 가리킨 그림으로 향했다. 그림은 거친 캔버스 위에 담채로 그려진 한 폭의 풍경화였다. 짙푸른 밤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앙상한 나무와 그 아래 작게 웅크린 새 한 마리. 그림 전반에 흐르는 깊은 슬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않는 희미한 희망이 느껴졌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림 속 나무 한 그루가 은서와 지훈이 어릴 적 자주 오르던 뒷산의 오래된 나무와 흡사했다는 점이었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두 사람이 어린 시절 처음 만났던 곳의 약자가 새겨져 있었다. P.S.

“서연… 이라니…” 지훈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은서’의 ‘서’와 ‘연’이 합쳐진 이름일 수도 있었다.

그는 그림 앞으로 다가가 숨을 멈췄다. 붓 터치, 색감, 그림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선까지, 모든 것이 은서의 그림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니, 이것은 은서의 그림이었다. 그녀의 영혼이 붓끝을 통해 종이 위에 고스란히 옮겨진 것이었다. 지훈은 그림 속에서 그녀의 웃음소리, 그녀의 숨결을 느끼는 듯했다.

“이… 이 작가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최 관장은 지훈의 흔들리는 눈빛과 그림을 향한 그의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며 무언가 눈치챈 듯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연 작가는 거의 매일 이곳에 옵니다. 오후 늦게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해 질 녘이면 사라지죠. 하지만 외부인과의 접촉은 일체 피하고 있습니다.”

“작업실이요? 어디에 있습니까?” 지훈의 눈이 번뜩였다.

최 관장은 갤러리 안쪽, 굳게 닫힌 문을 가리켰다. “저 문 안쪽입니다. 지금은 아마… 없을 겁니다. 방금 전까지는 있었는데, 잠깐 바깥으로 나간 듯합니다.”

“방금 전이요?”

지훈은 문득 갤러리에 들어올 때, 뒤편 골목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그림자를 언뜻 본 기억이 떠올랐다. 흐릿한 인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그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설마…

그는 최 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갤러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좁은 골목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골목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수십 년을 찾아 헤맸던 그녀가,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그림 속 길 잃은 새처럼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며 그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골목 끝자락, 오래된 담벼락 아래 놓인 낡은 나무 벤치. 그곳에 누군가 두고 간 작은 스케치북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어릴 적 은서가 즐겨 그리던 형태의 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스케치북을 펼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린 시절 그와 은서가 함께 그려 넣었던 낙서였다. 한쪽 구석에 그의 이름 ‘한지훈’과 그녀의 이름 ‘이은서’, 그리고 그 사이에 하트 모양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세월의 흔적 속에서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그들의 서명.

그리고 그 페이지 뒤에는… 낯익은 필체로 쓰여진 짧은 메모가 있었다.

“길 잃은 새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지훈의 손이 떨렸다. 이것은 은서였다. 틀림없이 그녀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남긴, 혹은 스스로에게 남긴 메시지였다. 그는 스케치북을 가슴에 품고 고개를 들었다. 황혼이 짙어지는 골목길 끝, 한 여인의 희미한 그림자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시야는 이미 눈물로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그 그림자를 향해 무작정 발걸음을 내디뎠다.

“은서야!”

그의 절규는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