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공기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뺨을 스쳤다. 지우는 이삿짐 박스들 사이에서 쭈그리고 앉아 낡은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며칠 밤낮으로 고심하던 결정을 앞두고,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할머니의 유품을 뒤져 이 일기장을 찾아냈다. 지우의 손가락이 바랜 종이 위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잉크는 희미해졌지만, 할머니의 정갈한 글씨는 여전히 그 시절의 온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오래된 사진 속의 미소
오늘은 유난히 손때 묻은 페이지, 1958년 늦가을의 기록이 지우의 눈길을 붙잡았다. 닳아 해진 모서리에는 작게 접힌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스무 살 남짓한 앳된 얼굴로, 지금은 사라진 동네 어귀의 작은 개울가에 앉아 있었다. 흑백 사진이었지만, 그 미소만큼은 햇살처럼 환하게 느껴졌다.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1958년 10월 27일, 비갠 뒤 맑음.
오늘, 이진사님께 들려 그의 작업실에 다녀왔다. 낡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 세상은 이리도 경이로운 것을. 흐르는 개울물마저 반짝이는 은하수처럼 보였다. 그분은 내게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재주가 있구나, 숙녀는’ 하고 말씀하셨다. 심장이 두근거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흙먼지 날리는 우리 동네도, 매일 보던 논밭도, 그의 카메라를 통해 보니 새롭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사진을 찍고, 그 순간을 영원히 붙잡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어미는 내게 시집갈 준비나 하라 하지만, 나는 자꾸만 이진사님의 어두운 작업실, 현상액 냄새가 나는 그곳에 마음을 빼앗긴다. 어미는 내게 말한다. ‘세상에는 네가 원하는 것만 하고 살 수 없단다, 연아.’ 나는 안다. 하지만 이 가슴속 요동치는 갈망을 어찌할까. 이 풍경을, 이 순간을, 나의 시선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이 간절함을.
이진사님은 내게 오래된 카메라를 잠시 빌려주셨다. 내일은 저 개울가의 햇살이 쏟아지는 풍경을 담아보리라. 나만의 시선으로.”
지우는 할머니의 앳된 미소가 담긴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할머니는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지우에게 할머니는 늘 강인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현명한 분이셨다. 하지만 이 사진과 일기장은 할머니에게도 꿈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접힌 꿈의 흔적
페이지를 넘기자, 한동안 일기장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마치 급하게 쓰인 듯한 글씨가 나타났다.
“1959년 3월 15일, 바람 부는 날.
결국 카메라를 돌려드렸다. 어미가 쓰러지시고, 아버지는 밤낮으로 밭일을 하셔야 했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을 건사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이진사님은 내게 ‘재능이 아깝구나’ 하셨지만, 어찌할 도리가 있겠는가. 나는 더 이상 꿈을 좇을 수 없었다. 밤늦게 몰래 숨어 사진 현상법을 익히고, 동네 풍경을 담던 시간은 이제 사치일 뿐이다.
어미는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때로는 가장 귀한 것을 놓아야 할 때도 있단다’ 하셨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다. 그러니 나의 꿈은… 가슴 한편에 묻어두는 수밖에. 이진사님께 돌려드린 카메라를 보며,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추었다. 나의 청춘이, 나의 꿈이 저 카메라와 함께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 나는 연아가 아닌, 그저 누군가의 딸이자 누이, 그리고 곧 누군가의 아내가 될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저 렌즈 너머 세상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내가 보았던 그 빛, 그 그림자, 그 순간들을.”
지우는 일기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할머니는 평생 그 흔한 카메라도 한 번 제대로 만져보지 못하고 사셨다. 지우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카메라는 오직 손주들의 졸업식이나 잔치 때 한 번씩 꺼내드는 낡은 필름 카메라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셔터만 누르고 필름 교체나 현상 등은 늘 지우의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다.
지우는 지금, 뉴욕의 유서 깊은 미술관 큐레이터 제안과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기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꿈을 좇는다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해외에서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부모님은 안정적인 삶을 원하셨고, 지우 역시 부모님을 홀로 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의 일기 속에서, 지우는 자신과 닮은 또 다른 갈등을 보았다. 다만 할머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기꺼이 접었다. 그것은 시대가 강요한 희생이었을까, 아니면 할머니의 진정한 선택이었을까. 지우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가 남긴 메시지
“할머니…”
지우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그저 순종적인 삶을 사신 것이 아니었다. 가슴속 깊이 뜨거운 열정을 품고 살았으나, 다만 그 열정을 가족을 향한 헌신으로 바꿨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선택마저도 할머니에겐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용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는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으로 기록된 페이지는 훨씬 후대의 것이었다. 할머니가 팔순을 맞이하던 해의 기록이었다.
“2010년 5월 8일, 맑고 고요한 날.
오늘, 손녀 지우가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고 한다. 안정된 직장을 뒤로하고 말이다. 나를 닮아 고집이 세다. 나는 지우에게 그저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거라. 후회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하고 말해주었다. 나는 알지. 꿈을 접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하지만 동시에, 꿈을 좇는 것이 어떤 기쁨인지도 알기에. 내가 가지 못한 길, 지우는 꼭 가보았으면 좋겠다.
이따금 이진사님께 빌렸던 카메라를 떠올린다. 내가 찍고 싶었던 세상의 풍경들을.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살아왔으니. 다만 지우에게는, 나처럼 애써 접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펼쳐지기를 바랄 뿐이다. 너의 렌즈로 세상을 담고, 너의 붓으로 세상을 그려내거라. 나의 사랑하는 지우야.”
할머니의 글씨는 이제 더 희미해져 있었다. 글귀마다 지우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지지가 배어 있었다. 할머니는 지우의 선택을 이미 알고, 응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자신의 꿈을, 지우를 통해 펼치라고 조용히 격려하고 계셨던 것이다.
지우는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삿짐 박스들 사이로 놓인 스케치북과 펜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덮어두었던 작품들,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고민만 하던 것들이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지우에게 보내는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응원의 메시지였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지우는 낡은 일기장을 품에 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고, 그 속에서 지우는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명하게 보았다. 할머니의 꿈을, 자신의 꿈과 함께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우는 굳게 결심한 듯 휴대폰을 들었다. 이제 부모님께, 그리고 뉴욕 미술관 측에 답을 할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 지우의 손 안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