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525화

밤은 깊었고, 서재의 작은 스탠드만이 유일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수아는 낡은 일기장을 펼쳐 든 채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온몸의 신경은 닳아 해진 종이 위에 새겨진 희미한 글씨에 집중되어 있었다. 며칠 전 이모 미영과의 격렬한 다툼 이후, 수아는 내내 멍한 상태였다. 오래된 공장 부지 문제로 시작된 갈등은 결국 외할머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미영 이모는 어머니가 부당하게 희생당했다고, 그 모든 것이 외할머니의 독선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수아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했던 외할머니가 과연 그런 분이었을까. 답을 찾기 위해 다시 일기장을 펼쳤고, 마침내 숨겨진 진실의 조각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수백 페이지를 넘겨 도착한 곳은 찢어질 듯 얇아진 종이 위, 유난히 꾹꾹 눌러쓴 외할머니의 필체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었다. 1968년, 무덥고 가난했던 여름의 기록이었다.

그 여름의 서늘한 약속

“장마는 그쳤으나, 우리 집 마당에는 한숨이 마르지 않는구나. 둘째 동생 영희는 아픈 몸으로 어린 자식들을 붙들고 시집에서 쫓겨날 판이고, 하나 남은 오빠마저 전쟁 통에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 집안의 기둥은 무너진 지 오래다. 영희를 살리고, 그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짐을 질 것인가. 지게에 앉아 앞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내게는 영희의 눈물과 아이들의 마른 배가 더 큰 고통이었다.”

수아는 숨을 멈췄다. 영희는 바로 미영 이모의 어머니,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둘째 여동생이자 수아의 외할머니와는 자매지간인 대이모였다. 미영 이모가 늘 ‘우리 엄마는 그때 너무 약하고 선량해서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말했던 그 영희 대이모였다. 하지만 일기 속 외할머니의 글은 미영 이모의 이야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날 밤, 영희와 나는 마당에 앉아 달빛을 보았다. 영희는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제게 남은 것이라곤 병든 몸과 굶주린 자식들뿐이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흐느꼈다. 그 말에 내 심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우리는 가진 것이라곤 이 낡은 집과 뒷마당의 작은 밭뙈기가 전부였다. 빚은 쌓여갔고, 당장 내일 먹을 쌀도 없었다. 그때, 내가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영희의 빚을 갚고, 아이들을 살려야 했다. 하지만 이 집은 우리 자매의 공동 유산. 영희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수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영 이모가 항상 ‘외할머니가 영희 대이모를 속여 집을 담보 잡고, 결국 그 땅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사건이었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일기 속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영희는 내 말에 깜짝 놀랐다. ‘언니, 이 집은 우리 아버지의 유산이에요. 이걸 어떻게 담보로 잡아요? 나중에 땅을 잃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나는 조용히 영희의 손을 잡았다. ‘영희야, 지금 당장 아이들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몇십 년 뒤 땅이 누구 것이 되고 말고가 중요하더냐. 언니를 믿어라. 내가 너를 속일 리 있겠느냐. 내가 이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너의 빚을 갚아줄 테니, 너는 그 돈으로 새로 시작하여 아이들을 잘 키워라. 나중에 이 집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혹 그러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라 여기자.’ 영희는 한참을 울었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날 밤, 세상에 아무도 모를 서늘한 약속을 했다. 영희의 명의로 돈을 빌리고, 모든 서류는 영희의 이름으로 작성했다. 나는 단지, 뒤에서 모든 것을 도울 뿐이었다. 그래야 영희가 시집에서 다시 발붙일 명분이라도 생길 테니.”

수아는 일기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외할머니가 모든 책임을 지고, 심지어는 모든 비난을 감수하기 위해, 대이모 영희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진행했다는 것. 영희 대이모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명의를 빌려야 했던 상황에서, 외할머니는 언니로서 그녀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희 대이모는 시댁에 ‘자신이 집을 담보 잡아 돈을 마련했다’고 말하며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을 테고. 나중에 그 땅이 외할머니의 소유로 넘어간 것도, 처음부터 영희 대이모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기에 외할머니가 모든 것을 떠안았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그 모든 비난을 스스로 짊어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 일은 세상에 밝히지 않기로 영희와 약조했다. 영희가 새 삶을 시작하는 데 내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이 언니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뒷말이 무성하고, 내가 파렴치한 언니로 손가락질받을지라도, 내 동생과 조카들이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하늘이 이 언니의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는다. 영희야, 부디 너는 잘 살아다오. 이것이 언니의 마지막 소원이자, 사랑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외할머니의 연약하지만 강인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수아의 심장을 찢는 듯 아려왔다. 수아는 억눌렸던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낌이 서재의 정적을 깨뜨렸고, 눈물은 쉼 없이 흘러내려 낡은 일기장 위로 떨어졌다. 잉크가 번질까 조심스럽게 손으로 닦아냈지만, 이미 수아의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외할머니의 깊은 사랑과 희생이 새겨져 버린 뒤였다.

미영 이모는 평생을, 어머니가 언니에게 배신당했다고 믿고 살아왔다. 그 오해가 수십 년을 이어져 내려와 지금의 갈등을 낳았다. 외할머니는 영희 대이모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동생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홀로 감내하셨던 것이다. 그 짐을 혼자 짊어지고 가신 채, 그 어떤 변명도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외할머니의 침묵은 사랑이었고, 그 침묵이 낳은 오해는 이토록 뼈아픈 상처가 되어 자식들에게 대물림된 것이다.

수아는 일기장을 품에 안고 한참을 울었다. 외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외할머니의 영혼이었고, 오랜 세월 잊혔던 진실의 목소리였다. 이제 수아는 이 진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미영 이모가 이 감당하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진실이 또 다른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오해의 끈을 끊고 가족의 응어리를 풀어낼 유일한 열쇠가 외할머니의 이 사랑 어린 희생에 있음을 직감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수아의 마음속에는 새벽이 오고 있었다. 고통스럽지만, 외할머니가 남긴 빛으로 가족의 오랜 어둠을 헤쳐나갈 용기가 솟아났다. 수아는 젖은 눈을 들어 어둠이 짙게 깔린 창밖을 응시했다. 무겁고도 거대한 숙제가,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