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542화

흔들리는 손, 그 위로 쌓이는 고통

창밖으로는 희뿌연 겨울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새벽녘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창틀에 얇은 설탕 가루처럼 쌓여 있었지만, 세상의 모든 소리를 먹어치운 듯 고요했다. 준호는 소리 죽여 침대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향했다. 시계는 겨우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불안감은 마치 차가운 손처럼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최근 들어 하늘의 변화는 그의 눈에 너무나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환하게 웃었고, 예전처럼 따뜻한 손길로 그를 안아주었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피로와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떨림을 준호는 외면할 수 없었다. 특히, 그녀가 아끼던 도예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섬세한 붓을 쥐고 몰두하던 예전의 열정은 어딘가 흐릿해진 듯 보였다.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하늘은 직접 차를 우리지 않았다. 매일 아침 향긋한 차 향으로 그를 깨우던 그녀였다. 이제는 그마저도 그의 몫이 되어버렸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차를 끓이며 생각했다. 그녀는 왜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는 걸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동시에 그 진실이 두려웠다.

며칠 전, 그는 우연히 하늘의 서랍에서 작은 약병을 발견했다. 평소 그녀가 복용하던 비타민이나 감기약과는 다른, 이름 모를 전문 의약품이었다. 약병에는 희미하게 ‘신경계’라는 단어가 보였고, 그때부터 준호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 약이 주로 사용되는 질환들을 찾아보았고, 검색 결과는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설마 하는 마음과 아니길 바라는 절박함이 뒤섞여 밤잠을 설치게 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늘이 거실로 나왔다. 잠결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준호에게 살며시 다가와 그의 등에 기대며 읊조렸다. “벌써 일어났어요?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잠이 안 와서요. 당신은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준호는 애써 평온한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글쎄, 왠지 당신 혼자 깨어 있을 것 같아서요.” 하늘은 따뜻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더없이 슬프게 느껴지는 건 준호의 불안 때문일까. 그의 손을 잡으려던 하늘의 손이 순간 움찔하며 작은 떨림을 보였다. 준호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준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하늘아, 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

하늘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준호는 똑똑히 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뭘 숨긴다고…”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 끝은 가늘게 떨렸다.

“그 약병… 서랍에서 봤어. 그리고 당신 손… 요즘 계속 떨리는 거 나도 알고 있어.” 준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는 하늘이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늘은 고개를 숙였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준호는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마저 무겁게 내려앉은 듯한 순간,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하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말할 용기가 없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마치 얼어붙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희미했다. “지난달부터, 손이 자꾸 떨리고… 힘이 빠지는 것 같았어요. 처음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병원에 가보니… 재발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병이…”

준호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병’. 오래전, 그녀가 스무 살 무렵 앓았던 희귀 신경계 질환. 기적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았던 바로 그 병이었다. 그 병은 그녀의 꿈을 잠시 멈추게 했고, 그들의 겨울 눈꽃 아래 약속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던 아픔의 원인이기도 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이겨내자’는, 그날의 맹세가 다시금 그의 귓가에 울렸다.

“왜… 왜 이제 말해주는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준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깊은 좌절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하늘의 눈에서는 이미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신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또다시 내가 아프면… 당신이 얼마나 힘들어할지 알아서… 우리 미래, 그렇게 힘들게 쌓아 올린 건데… 나 때문에 다 무너질까 봐… 무서웠어요.” 하늘은 흐느끼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몸은 마치 작은 새처럼 떨리고 있었다. 예전의 생기 넘치던 그녀의 손은 이제 병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 창백하고 가늘었다.

준호는 그녀를 꽉 안았다. 그의 눈에도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짐이라니. 짐이라니! 그는 하늘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왜 짐이 돼? 그게 우리 약속의 전부였잖아. 어떤 순간에도 서로의 옆을 지켜주기로 한 약속.”

창밖의 눈은 이제 굵어지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들이 쉴 새 없이 창문을 때렸다. 마치 그들의 고통을 대신하듯, 아니면 그들의 아픔을 조용히 감싸 안아주려는 듯이.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행복한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혹독한 추위와 어둠 속에서도 함께 빛을 찾아 나서겠다는, 더욱 고된 맹세였음을 준호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 괜찮아… 괜찮을 거야… 치료받으면…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 거야…” 하늘은 그의 품에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확신보다 깊은 절망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손으로 더 이상 섬세한 도자기를 빚거나,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준호는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하늘아, 잘 들어.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힘들어해도 괜찮아. 아파도 괜찮아.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 우리 함께야. 그때 그랬잖아. 눈꽃이 아무리 거칠게 몰아쳐도, 그 눈보라 속에서 서로의 온기가 되어주기로.”

그의 목소리는 흔들렸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과 결심은 세상의 어떤 눈보라도 막아낼 듯 단단했다. 하늘은 그의 눈을 보았다. 거기에는 자신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과, 어떤 절망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금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아침 해가 희미하게 구름 사이로 비치기 시작했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창밖의 풍경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눈물과 고통 위로, 겨울 눈꽃은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 고통스러운 재회와 고백의 순간은, 그들의 약속을 다시 한번 굳건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독하게 차가운 겨울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을 작은 불꽃 하나가 다시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이 길을 다시, 함께 걸어야 했다. 고통 속에서 피어날 새로운 희망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