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527화

김지훈은 차가운 해풍이 뺨을 스치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해안 도로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낡은 이정표마저 바람에 닳아 글자가 희미한 곳이었다. 그가 527번째 발자국을 새긴 이 외딴곳은, 지난 몇 주간 그를 잠식했던 한 장의 낡은 그림엽서가 가리키던 종착점이었다. 유진이 스무 살 때, 언젠가 꼭 살아보고 싶다던 바닷가 마을의 풍경화. 그때는 그저 풋풋한 꿈처럼 들렸던 이야기가, 이제는 그녀의 흔적을 쫓는 유일한 지표가 되어버렸다.

그는 오래된 랜드로버의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부터 먹먹하게 들려왔다. 안개 낀 새벽 공기 속에서 습기와 바다 내음이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눈앞에는 낡았지만 정갈하게 가꿔진 목조 건물이 서 있었다. ‘별 헤는 밤’이라는 낡은 간판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작은 카페 겸 도예 공방이었다. 엽서 속 그림처럼, 언덕배기에 홀로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섬뜩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수많은 헛된 발걸음, 수많은 실망,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났던 찰나의 희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번만은 달랐다. 지난밤, 낡은 일기장 페이지 사이에서 발견된 희미한 스케치와 이 주소. 유진의 필체가 분명했다. 그녀가 꿈꾸던 그곳,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유리창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른 아침, 카페 문을 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하지만 누군가 안에 있다는 건 분명했다. 지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15년. 15년 만에, 이토록 가까이 다가선 적이 없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그가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 안에서 희미하게 도자기를 빚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얇은 문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오래전, 그가 유진에게 불러주었던 노래였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추억이 담긴 멜로디.

유진의 노래

지훈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섰다. 머릿속의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오직 그 노랫소리만이 그의 존재를 채웠다. 유진의 목소리였다. 변함없이 맑고, 슬픔과 평온이 묘하게 섞인 음색.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참았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이 모든 것이 환상처럼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는 문 옆에 있는 낡은 나무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나와 바다 위를 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지갑을 꺼내, 그 안에 고이 간직했던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대학 시절, 벚꽃이 흩날리던 캠퍼스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유진의 모습. 그때 그녀는 스무 살, 자신은 스물두 살이었다. 그 이후로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노랫소리가 잠시 멈췄다. 도자기를 빚는 소리도 멎었다. 적막이 흘렀고, 지훈은 숨을 죽였다. 그녀가 바깥으로 나올 것인가? 아니면 그가 먼저 문을 두드려야 할까?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해답은 없었다. 15년의 세월이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켰을지 알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조우

그때였다. 카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지훈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의 시선은 문틈으로 비치는 그림자에 고정되었다. 긴 머리, 가는 실루엣…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유진이 아니었다. 앳된 얼굴의 젊은 여성이었다.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막 구워낸 듯한 따뜻한 머그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젊은 여성은 지훈을 발견하고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저… 혹시, 손님이세요? 아직 문 열 시간은 아닌데요.”

지훈은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봅니다. 혹시… 여기에 한유진 씨가 계신가요?”

여성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머그잔을 한 손으로 고쳐 잡으며,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지훈을 응시했다. “어떤 분을 찾으시는 거죠? 여기에는 그런 이름의 직원은… 없습니다만.”

직원? 아니, 그녀는 주인이었다. 지훈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 직후, 여성의 시선이 카페 안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순간, 지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카페 안쪽 진열대에 놓인, 작고 투박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도자기 인형들이었다. 그리고 그 인형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한 쌍의 조그만 새 모양 도자기. 그것은 유진이 대학 시절 처음으로 만들었던 작품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선물했던 그 새 한 쌍. 심지어 한쪽 새의 날개 끝이 살짝 깨진 것마저도 똑같았다.

“저 인형들… 유진 씨가 만든 건가요?”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젊은 여성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사라지고, 미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아세요? 엄마가 가장 아끼는 작품인데…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거든요.”

엄마. 그 단어가 지훈의 귓가에 맴돌았다. 엄마. 유진의 딸이었다. 15년… 그 긴 세월 동안 유진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딸까지 낳아 키웠던 것이다. 기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상실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의 첫사랑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 카페 안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인아, 누구 왔니?”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 번 쿵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 15년간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울리던 그 목소리였다. 그는 문 안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 주방에서 나오던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앞치마를 두르고, 밀가루인지 흙먼지인지 모를 하얀 가루가 묻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

그녀가 지훈을 바라보았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주름진 눈가와 조금은 야윈 볼이었지만, 그 눈빛은 여전했다. 지훈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첫사랑, 한유진.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녀가,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수많은 질문, 수많은 감정들이 폭풍처럼 몰려왔지만,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를 뿐이었다.

“…유진아.”

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손에서 들려있던 머그잔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커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소리가 해안 마을의 고요를 깨트렸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기억을 더듬는 듯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훈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침내 교차했다. 15년 만의 재회. 그들의 재회는,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바닷가처럼,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들을 밀어 넣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