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537화

찬 바람이 불어오는 병실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은 마치 겨울의 비극을 선언하듯 앙상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지우는 차가운 병실의 의자에 앉아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하은을 응시했다. 무수한 생명 유지 장치들이 위태로운 숨결을 대신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지우는 그 평온함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싸워 얻어진 것인지 알고 있었다.

“벌써 한 달이 지났군.”

정적을 깨고 문이 열리며 태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의 그림자는 차갑게 병실 바닥을 가로질렀다. 지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눈빛만으로 그를 노려봤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지 않나, 한지우.”

태준은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하은의 침대 옆에 다가섰다. 그의 시선이 하은의 가녀린 손목에 채워진 의료용 밴드에 잠시 머물렀다. 지우의 심장이 싸늘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태준은 하은을 아끼는 척했지만, 그에게는 단지 거래를 위한 패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지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가 제안했던 치료법, 아직 유효하다. 물론 자네가 그 대가를 치른다면 말이지.”

태준은 주머니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탁자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계약서였다. 지우는 그것을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내용은 이미 수도 없이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은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태준이 주장하는 그 치료는, 달빛마을의 모든 권리를 자신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얼어붙은 시간의 파편

달빛마을. 그 이름만으로도 지우의 마음속에서는 아릿한 그리움과 분노가 교차했다. 그곳은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하은과 자신이 어릴 적 모든 꿈을 심었던 곳, 무수한 겨울을 함께 견뎌내며 서로의 온기가 되어주었던 약속의 장소였다.

“하은이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어. 자네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건 의사들도 인정하는 부분 아닌가? 내가 제공하는 최신 치료 기술이 아니면, 더 이상 가망이 없어.”

태준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 말은 현실이었고, 잔인했다. 지우는 창백하게 질린 하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며칠 전부터 미세한 경련이 시작되었고, 의료진은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지우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달빛마을을 넘기는 것은 단순한 재산의 상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은과의 가장 소중한 약속을 깨트리는 행위였다.

“자네는 그 약속 때문에 하은이를 죽일 셈인가? 어리석은 미련은 버려. 하은이가 깨어나면 무엇을 가장 원하겠나? 살아있는 자네와 함께하는 미래지, 사라진 옛터가 아니야.”

태준의 말이 비수처럼 박혔다. 그는 지우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고 있었다. 하은을 살리는 것이 약속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적인 생각이 지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겨울의 맹세

지우의 시선은 태준을 지나 병실 창밖의 회색 풍경으로 향했다. 순간, 그의 눈앞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달빛마을, 그 가운데 서 있는 어린 하은의 모습이었다.

“지우야, 저 눈꽃 봐. 하나하나 다 다른 모양이래.”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늘에서 춤추듯 내려오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던 하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때는 열두 살의 겨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세상에 단둘만 남겨진 것처럼 느껴지던 차가운 날이었다. 어린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달빛마을의 작은 오두막 앞에 서 있었다.

“우리가 크면 이 마을을 다시 예전처럼 만들자.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꽃들도 심고, 시냇물도 맑게 흐르도록 돌보고.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절대 이 마을을 떠나지 말고, 서로를 잊지 말자. 응?”

하은의 말에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내리는 겨울의 한가운데, 두 어린 영혼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순수한 맹세를 주고받았다. 그들의 작은 손바닥 위로 떨어진 눈꽃은 녹아 사라졌지만, 그 약속은 지우의 심장에 영원히 새겨졌다. 그것은 그저 어린 시절의 철없는 맹세가 아니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삶의 이유가 되어준 구원의 끈이었다.

그 약속이, 지금 태준의 손에 들린 계약서 한 장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달빛마을은 하은과 지우의 영혼이 깃든 곳이었다. 그곳을 넘긴다는 것은 그들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서로를 향한 사랑마저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결단의 순간

“결정할 시간은 오늘까지다, 한지우.”

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현재로 지우를 끌어당겼다. 지우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눈꽃이 내리던 날의 맹세가 그의 마음속에서 강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하은을 살려야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을 버리면서까지 그녀를 살리는 것이 과연 그녀가 원하는 삶일까? 약속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지우는 탁자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태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지우가 펜을 잡았다. 서류의 빈칸에는 그의 서명이 들어가야 할 곳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펜이 떨렸다. 하은의 희미한 숨소리가 그의 귀에 닿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지우는 결심했다.

“아니.”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태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이 서류에 서명하지 않아.”

지우는 서류를 내려놓고 태준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은이를 살리는 방법은, 당신이 말하는 그 방식뿐만이 아니야. 다른 길을 반드시 찾을 거야. 설령 찾지 못하더라도, 그녀와의 약속을 깨뜨리면서까지 얻는 삶은 의미 없어. 달빛마을은 우리의 희망이야. 그곳이 사라지면, 하은은 깨어나도 행복할 수 없어.”

태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지우가 끝내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군, 한지우.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는 당신이 하게 될 거야, 강태준.”

지우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하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지우의 손길에 미세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지우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하은아, 걱정 마. 우리 약속, 내가 꼭 지킬게. 달빛마을도, 너도, 내가 반드시 지켜낼 거야. 아무리 힘든 겨울이 와도, 우리는 함께할 거야. 눈꽃이 다시 내리는 날까지, 나는 포기하지 않아.”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좌절의 눈물이 아니었다. 절망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굳건한 결의의 눈물이었다. 병실 밖에서는 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지우의 마음속에서는 따뜻한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잠들어 있지만 살아있는 하은이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