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은 언제나 복잡하지만, 이토록 고요한 순간도 있었다.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무수한 별들이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반짝였다. 희미한 달빛 아래, 도시의 불빛은 오히려 겸손해 보였다. 현우는 오래된 원목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 낡은 진공관 라디오에서는 익숙하고도 포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DJ 지아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방송은 벌써 549번째 밤을 맞고 있었다. 현우가 이 라디오를 처음 들었던 건 아마도 10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대학 시절, 막연한 불안감에 잠 못 이루던 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이 프로그램에 멈췄다. 그리고 그 후로 셀 수 없이 많은 밤들을 지아의 목소리와 함께 보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밤하늘의 별처럼 멀리서 반짝였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오늘도 여러분의 밤을 지키는 지아입니다.”
지아의 차분한 인사에 현우는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사연 하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놓쳐버린 계절’이라는 제목의 사연이었다. 발신인은 자신을 ‘늦가을 나무’라고 소개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네가 이걸 듣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매년 이맘때면 우리가 함께 보냈던 마지막 가을을 떠올려.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너는 나보다 더 어렸지. 가끔은 내가 좀 더 너그러웠더라면, 좀 더 이해심이 많았더라면, 우리의 겨울이 그토록 길고 차갑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
사연 속 화자의 목소리는 지아의 잔잔한 음성을 통해 현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차 잔을 꽉 쥐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누나, 민영이었다.
부모님을 갑작스럽게 잃고 난 후, 스무 살의 민영과 고작 열다섯 살이었던 현우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서로에게 기댈 줄 몰랐다는 점이었다. 민영은 어린 현우 앞에서 강한 척했고, 현우는 누나의 어깨에 얹힌 짐의 무게를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기보다는, 서로에게 날카로운 가시를 세웠다. 결국, 작은 오해가 쌓이고 쌓여 그들의 관계는 끊어졌다. 현우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집을 떠났고, 그 후로 몇 번의 명절 외에는 민영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마저도 형식적인 인사뿐, 진심은 오가지 못했다.
“…너는 늘 내 그림자를 밟으며 따라오던 작은 아이였는데, 어느새 나보다 키가 커져 버렸더구나. 그 세월 동안 나는 변변한 안부조차 전하지 못했어. 혹시 너도 나와 같은 후회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을까.”
늦가을 나무의 사연은 계속 이어졌다. 지아의 목소리에는 사연자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했다. 현우는 자신이 누나에게 보냈던 마지막 메시지를 떠올렸다. 몇 년 전, 누나의 생일에 보냈던 ‘생일 축하해’라는 단 세 마디. 답장은 없었다. 그때부터 현우는 연락을 포기했다. 아니, 포기했다고 자신을 속였다. 사실은 겁이 났다.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 누나가 그 손을 뿌리칠까 봐 두려웠다. 어쩌면 누나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서로가 서로의 연락을 기다리며, 애써 담담한 척했을까.
“늦가을 나무님께서 보내주신 사연 잘 들었습니다. 놓쳐버린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 계절의 씨앗은 언제든 다시 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떤 별들은 수천 년 전 이미 사라졌지만, 그 빛은 여전히 우리에게 닿아 밤하늘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인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닐 때가 더 많습니다.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처럼, 어쩌면 여러분의 인연도 그저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아의 말이 현우의 귀에 맴돌았다. 보이지 않아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별. 현우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 유독 빛나는 몇몇 별들은 마치 그의 심장처럼 미약하게 반짝였다. 그 빛은 누나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후회였을까.
“오늘 밤, 이 사연을 듣고 계실 또 다른 ‘늦가을 나무’님께, 그리고 그 빛을 기다리는 ‘작은 별’님께 전하고 싶은 노래입니다.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어 보세요. 어쩌면 그 손은 이미 당신을 향해 뻗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지아는 노래를 소개했다. 오랜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남아있던 멜로디였다. 어머니가 자주 흥얼거리던 자장가 같기도 하고, 어릴 적 누나가 현우를 재워주며 불러주던 노래 같기도 했다. 그 노래는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현우의 마음을 감쌌다. 잊고 있던 온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현우는 테이블 위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은 잠겨 있었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잠금 화면을 풀었다. 통화 기록에 가장 위에 있는 번호는 물론 민영의 번호가 아니었다. 그는 주소록을 한참이나 스크롤했다. ‘누나’라고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발견했을 때, 현우의 심장은 공연히 불안하게 요동쳤다. 발신 버튼 위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지금 전화하면 누나가 받을까. 받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 준비가 과연 자신에게 되어 있을까.
노래는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었다. 지아의 목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늦은 밤, 잠 못 이루는 당신의 곁에 작은 빛이 되기를 바라며. 편안한 밤 되세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고, 이내 익숙한 클로징 멜로디와 함께 프로그램이 끝났다. 현우의 작은 방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고요함이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현우는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미약하지만 확실한 용기의 파편이 그의 심장 속에서 꿈틀거렸다.
현우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직은, 아직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더 많은 별들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야 그 빛을 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절에는, 늦가을 나무에게 닿을 작은 별의 빛이 있을 것이었다. 다음 방송에서는, 어쩌면 그가 직접 쓴 사연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현우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밤은 이제 더 이상 차갑지만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