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539화

창밖은 잿빛이었다. 늦가을의 우울을 넘어 초겨울의 스산함이 짙어지는 오후.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희미한 탄식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 안에도 그와 비슷한 탄식이 고여 있었다. 최근 몇 주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겹겹이 쌓여 마음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데, 따뜻한 온기가 다리에 닿았다. 익숙한 무게, 익숙한 털의 감촉. 별이였다. 내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오른 별이는 보드라운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초록색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가 담겨 있었다.

“또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별이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렸다. 낮고 부드러웠으나,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애틋하게 들렸다.

나는 쓰게 웃었다. “골똘히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골똘히 늪에 빠져 있는 거지.”

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발바닥으로 내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그 작은 동작이 마치 “그래? 그럼 내가 건져줄게”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별이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주었다. 목덜미를 쓰다듬자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흐려지는 풍경, 짙어지는 감정

“가끔은 말이야,” 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사라지는 것 같아서 두려워. 내가 잡고 싶었던 것들, 간직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야. 그리고 내가 놓친 것들 때문에 지금의 나조차 흐릿해지는 것 같아.”

별이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내가 겪는 불안과 망설임이 고스란히 비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평온함이 함께 존재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아니, 정확히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사라지는 것은 없어.” 별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다만 형태를 바꿀 뿐이지. 흐르는 강물이 바다로 가고, 그 바다의 물이 증발해서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리는 것처럼. 너의 시간도, 너의 감정도, 그리고 너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도 그렇게 형태를 바꿔 존재하는 거야.”

“하지만 그게 위로가 되지는 않아. 사라진 것들은 그 자체로 소중했으니까.”

별이는 가만히 내 무릎에 얼굴을 부비고는, 내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감촉이 마음의 한 조각을 녹이는 듯했다.

발자국의 의미

“네가 지나온 길은 발자국으로 남아있어.” 별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서 있는 이곳도, 언젠가 되돌아보면 수많은 발자국 중 하나가 될 거야. 그 발자국들이 희미해진다고 해서 길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오히려 그 희미함 속에서 새로운 길이 보일 수도 있어.”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어 있는 나뭇가지들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봄을 기다리는가, 아니면 새로운 눈꽃을 기다리는가.

“나는 가끔, 내가 너무 많이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가고 싶었던 길이 있었는데, 엉뚱한 곳으로 와버린 기분.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길고양이의 삶이 그래.” 별이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매일 새로운 길을 걷고, 매일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삶. 때로는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모든 길은 이어져 있어. 중요한 건,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느냐야. 네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엉뚱한 곳이라고 생각해도, 이곳에서 만나는 바람과 햇살, 그리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작은 온기들이 너의 길을 만들어가는 거야.”

별이는 내 손을 깨물 듯이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장난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그 속에는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만약 네가 그 모든 발자국을 부정한다면, 너는 지금의 너를 부정하는 것과 같아. 네가 엉뚱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 길조차도 너의 일부이고, 너를 만들었어. 어제의 네가 오늘의 너를 만들고, 오늘의 네가 내일의 너를 만들겠지.”

작은 온기가 주는 위로

그 말이 가슴에 쿵, 하고 떨어졌다.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 모든 선택, 심지어 후회스러운 순간들까지도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조각들이었다. 그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나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라는 별이의 말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위안을 주었다.

별이는 조용히 내 무릎 위에서 자세를 바꾸더니,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내 가슴에 닿았다. 녀석의 심장 박동이 아주 희미하게 전해져왔다. 작지만 굳건한 생명의 리듬이었다.

“흐릿해지는 것 같다고 했지?” 별이가 다시 내 안에서 속삭였다. “하지만 흐릿한 것이 꼭 나쁜 건 아니야. 때로는 흐릿해야 더 많은 것이 담길 수 있거든. 선명한 그림은 하나의 답만을 강요하지만, 흐릿한 여백은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어. 너의 과거가 흐릿해진다고 느끼는 건, 아마 네가 더 넓고 새로운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지도 몰라.”

나는 별이를 힘껏 안았다. 녀석은 묵묵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내 안의 공기는 별이의 온기로 가득 차 따뜻했다.

“고마워, 별아.” 나는 목이 메었다.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별이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여전히 깊고 고요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아주 미묘한 미소가 담겨 있는 듯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한 벗이 건네는 무언의 약속처럼.

나는 이제 더 이상 창밖의 잿빛 풍경에 갇혀 있지 않았다. 별이의 말처럼, 흐릿한 여백 속에서 나만의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그림은 아마도, 별이와 함께하는 따뜻한 시간들로 가득 차 있겠지. 어쩌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사라진다 해도, 이 작고 따뜻한 온기만큼은 영원히 내 곁에 남아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생겼다.

차가운 오후의 햇살이 잠시 구름 사이로 비쳐들어와, 별이의 털 위로 부서졌다. 그 순간, 별이는 내게 길고양이이기 이전에, 우주에서 온 작은 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잃은 나를 비추는, 가장 환하고 따뜻한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