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537화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수아는 오래된 망원경의 차가운 금속을 부여잡았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린 통증이 전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릿한 창문 밖으로는 하얀 눈발이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이 높은 곳, 아무도 찾지 않는 폐쇄된 천문대에서 그녀는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겨울날처럼, 오늘 역시 눈이 내렸다.

수아의 시선은 낡은 책상 위, 먼지 쌓인 일기장으로 향했다. 십여 년 전, 오빠 지훈이 사라지던 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날 밤, 흰 눈이 온 세상을 뒤덮던 그 밤, 지훈은 그녀에게 약속했다. “수아, 어떤 일이 있어도 진실은 밝혀낼 거야. 약속해 줘. 네가 나 대신 꼭 알아내겠다고.”

그녀는 일기장을 펼쳤다. 닳고 닳은 페이지마다 지훈의 필체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마지막 장, 밑줄 쳐진 문장이 그녀의 눈에 박혔다. ‘별이 떨어지는 곳,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그곳에서 모든 실마리를 찾을 것이다.’
그때는 그저 감성적인 문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과거를 파헤친 끝에, 수아는 그 문장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별이 떨어지는 곳.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곳. 이곳, 폐쇄된 천문대였다. 지훈이 어린 시절부터 별을 보며 꿈을 키웠던 장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봤던 그곳.

“드디어… 오빠.”

수아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지난 세월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걸었다. 가족의 반대, 친구들의 걱정, 심지어 자신의 안전까지도 외면한 채 달려왔다. 그리고 오늘, 그 모든 희생이 보상받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다.

일기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얇은 종이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처음 보는 종이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펼쳐진 종이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별자리 지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작은 원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원 안에는 알아볼 수 없는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분명 암호였다. 지훈이 생전에 몰두했던 고대 천문학 연구와 관련된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울렸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찾았던 단서가, 이렇게 허무하게 나타나다니. 수아는 급히 망원경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삐걱거리는 기계음이 천문대 안에 울려 퍼졌다. 암호에 적힌 숫자들은 망원경의 좌표를 의미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 숫자를 하나하나 맞춰나갔다.

차가운 렌즈 너머로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하늘, 그리고 희미하게 빛나는 별들. 수아는 렌즈에 눈을 대고 지도를 따라 천천히 망원경을 돌렸다. 별자리가 하나씩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움과 간절함이 뒤섞인 숨결이 렌즈에 닿아 하얗게 서렸다.

그리고 마침내, 지도가 가리키는 정확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였다. 어둠 속에 홀로 빛나는 작은 별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별은 다른 별들과는 다른, 미묘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 주위에는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처럼, 희미한 빛의 고리가 둘러져 있었다.

수아는 숨을 들이켰다. 단순한 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표식 같았다. 지훈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 수아는 렌즈에서 눈을 떼고, 일기장과 별자리 지도를 다시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천문대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천문대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 시간에 이곳을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키가 크고 왜소한 체격의 남자였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였다.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협적인 기운은 수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한수아.”

낮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천문대 안에 울렸다. 그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동시에 섬뜩할 정도로 익숙한 기시감을 안겨주었다. 수아는 일기장과 지도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난 십여 년간, 자신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림자에 의해 쫓기고 있었음을. 지훈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려는 그녀의 모든 노력은,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누구죠?” 수아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수아를 집어삼킬 듯이 길게 드리워졌다. 창밖의 눈보라는 더욱 거세져, 천문대 안은 마치 폭풍우 속 작은 섬 같았다. 남자는 모자 아래로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수아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십 년 전, 지훈의 실종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아니, 이미 오래전 은퇴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눈은 차갑고 무정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는 오래된 비밀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약속, 이제 그만 잊는 게 좋을 거야.” 남자는 싸늘하게 말했다. “더 이상 파헤치다가는… 네 오빠처럼 될 수도 있으니.”

그 말에 수아의 온몸이 굳어버렸다. 오빠처럼 된다니.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 남자는 단순한 방해자가 아니었다. 그는 진실을 은폐하려는 거대한 음모의 한 조각이자, 동시에 지훈의 실종과 직접적으로 얽혀 있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당신이… 오빠를…?” 수아는 겨우 입을 열었지만,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남자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네 오빠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았어. 너도 마찬가지가 되겠지.”

그의 손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손에 든 일기장과 지도가 그녀의 유일한 무기이자, 동시에 마지막 희망이었다. 밖에서는 눈꽃이 격렬하게 춤추며 천문대를 휘감았다. 마치 십 년 전 그날 밤처럼,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싸늘한 겨울밤이었다. 수아는 쏟아지는 눈송이 속에서 오빠와의 약속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남자가 한 발 더 다가왔다. 그의 손에 섬광이 번쩍였다. 수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다짐만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모든 것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