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초가을 햇살은 유난히도 따뜻했지만, 준호의 심장은 여전히 북풍 한가운데 갇힌 듯 시렸다. 지아를 찾아 헤맨 시간은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고, 그 세월의 간극만큼 그녀의 흔적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어제 저녁, 익명의 제보자가 건넨 낡은 사진 한 장은 다시 한번 그의 가슴에 불씨를 지폈다. 사진 속 어린 지아는 낯선 노파와 함께 서 있었다. 배경은 한눈에 봐도 오래된 보육원이었다. 그가 알던 지아의 과거와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굽이진 시골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지도에도 겨우 표기된 작은 마을이었다. 버려진 듯 덩그러니 놓인 보육원의 낡은 대문은 녹슨 경첩 소리를 내며 준호를 맞이했다. ‘희망 보육원’. 빛바랜 간판이 삐딱하게 걸려 있었다. 마당은 잡초가 무성했고, 창문은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코끝을 스쳤다. 적막 속에 울리는 그의 발소리가 왠지 모르게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계세요?” 조심스럽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텅 빈 공간의 메아리뿐이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이토록 분명한 단서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별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준호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인기척에 걸음을 멈췄다. 작은 쪽문이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낮은 노랫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텃밭을 일구는 듯한 백발의 노파가 낡은 모자를 쓴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사진 속 노파와 놀랍도록 닮은 모습이었다.
“할머니,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가 희망 보육원이 맞나요?” 준호의 목소리에 노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형형한 눈빛이 그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젊은 남자의 방문이 익숙지 않은 듯 경계심이 역력했다.
“맞긴 맞는데, 이제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왔어?” 노파의 목소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제가… 아주 오래전, 이 보육원에 있었다는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한지아라는 이름의 아이를 아시는지… 혹시 이 사진 속 할머니가 맞으신지요?” 그는 낡은 사진을 내밀었다.
노파의 눈빛이 사진 속 어린 지아의 얼굴에 닿는 순간,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준호는 놓치지 않았다. “지아… 지아라….” 노파는 잊었던 이름을 되뇌는 듯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그래, 내가 맞고 말고. 우리 지아가 벌써 이렇게 컸을까…” 노파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할머니께서는 지아와 어떤 관계셨습니까?” 준호의 심장이 조여드는 듯했다. 드디어, 그녀의 흔적에 닿은 것이다.
“나는 여기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던 이모였다네. 지아는… 아주 어릴 때 이곳에 왔어. 세상 물정 모르는 순한 아이였지. 하지만 늘 그림을 그렸어. 보육원 창밖을 보면서, 온 세상에 없는 것들을 상상해서 그렸지.” 노파, 이모님은 회상에 잠긴 듯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제가 알던 지아는… 고아는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알던 지아의 삶과 이모님이 말하는 지아의 삶 사이에 거대한 균열이 존재했다. 그의 첫사랑은 그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던 걸까?
이모님은 준호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아이들 중에는 부모가 버린 아이도 있었고, 지아처럼… 갑작스러운 불행으로 잠시 맡겨진 아이도 있었지. 지아는… 그래, 그녀의 부모님이 잠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곳에 오게 되었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아이는 그 짧은 시간에도 깊은 상처를 받았지.”
준호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가 알던 지아는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이런 아픈 과거가 있었다니. 그가 지아를 처음 만났던 18살, 그녀는 이미 그 그림자를 지우고 있었던 것일까. “그럼… 언제쯤 이곳에 있었고, 언제쯤 떠났는지 아십니까?”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을 거야. 몇 년 후… 그녀의 부모님이 다시 찾아왔어. 하지만 지아는 그 부모님을 따라가지 않으려 했지. 그때… 많이 아팠던 기억이 나. 아이가 어찌나 울던지. 결국은 갔지만… 그 후로 다시는 연락이 닿지 않았어. 아마 그 부모님과도 다시 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 이모님의 말은 한지아의 사라진 10년에 대한 어렴풋한 단서가 아닌, 그녀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슬픔의 서막을 알리는 듯했다.
“지아가 떠나기 전에… 혹시 뭔가 남긴 것이라도 없을까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준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었다. 이모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텃밭 한구석에 있는 낡은 창고로 안내했다. 먼지 쌓인 상자들 틈에서, 이모님은 조심스럽게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스케치북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이건 지아가 이곳에 있을 때 아끼던 스케치북이야. 떠나면서 미처 가져가지 못했던 모양이지.” 이모님은 스케치북을 준호에게 건넸다. 준호는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펼쳤다. 낡은 종이 위에는 어린 지아의 서툰 그림들이 가득했다. 보육원의 풍경, 친구들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자, 준호의 눈길이 멈췄다. 한 장의 그림이 접혀 있었다. 펼치자, 그가 지아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교정의 느티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게 쓰인 글귀가 있었다.
“기다릴게, 다시 만날 때까지.”
준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것은 자신을 향한 메시지인가? 아니면 어린 지아의 막연한 바람이었을까? 그 어떤 것이든,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강력한 증거였다. 그녀는 어딘가에 있고, 그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손가락이 그림을 쓸어내렸다. 이 그림이 그녀가 남긴 가장 진실한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모님, 지아가 떠난 후에… 혹시 연락이 닿았던 다른 친구나, 이곳을 방문했던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준호는 스케치북을 품에 안고 다시 물었다. 이모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아, 그래! 몇 년 전에, 지아 또래의 젊은 아가씨가 이곳을 찾아왔었지. 자신을 지아의 ‘오래된 친구’라고 소개했는데… 아마도 지아가 이곳을 떠난 후에 알게 된 친구 같더군. 지아의 행방을 묻던데, 나도 아는 게 없어 돌려보냈지. 이름이… 아, ‘서연’이라고 했었지. 인상이 참 좋았어. 지아를 많이 걱정하는 듯했지.”
서연. 새로운 이름. 새로운 실마리. 준호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빠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지아가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 후에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을 가능성. 그리고 그녀를 기억하고, 걱정하는 또 다른 사람의 존재. 이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보육원을 나서는 준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방황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지아의 과거와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그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그녀를 찾아낼 다음 단서, 서연이라는 이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