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가을 끝자락의 햇살이 희미하게 방안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 빛마저도 어딘가 서글프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낡은 원목 탁자 위, 김이 식어가는 차 한 잔. 그 옆에는 한없이 나른한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별이 있었다. 검은 털은 햇빛에 닿아 은은한 보랏빛을 띠었고, 가늘게 뜬 눈은 언제나처럼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 심오했다. 바람이 흔드는 창밖의 나뭇가지에서 마른 잎들이 툭, 툭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혜는 손에 든 낡은 책을 말없이 내려놓았다. 책갈피에는 빛바랜 작은 나뭇잎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오래전, 별이와 처음으로 함께 산책했던 숲에서 주웠던 잎사귀였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세상이 온통 회색이었던 날, 별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에 처음으로 색깔을 입혔더랬다.
“별아,” 지혜가 나지막이 불렀다.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오늘따라… 모든 게 멀게 느껴져. 우리가 함께 걸어온 시간들마저도.”
별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세상의 모든 고요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 이내 몸을 일으켜 지혜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부드러운 털이 지혜의 손등을 스치며 따뜻한 온기를 전했다.
“네가 돌아온 날부터 모든 게 변했지, 지혜.” 별이의 목소리가 지혜의 마음속에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언제나 그랬듯, 따뜻하고 명료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예를 들면, 이 햇살, 그리고 너의 고요함.”
지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고요함이 고요함일까, 아니면 그냥 체념일까?”
“둘 다일 수 있지. 체념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으니.” 별이는 가르치듯 말하는 대신, 그저 옆에 있어 주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오늘 밤은 유난히 깊은 꿈을 꾸었더군. 불안한 그림자가 너를 맴도는 것을 보았어.”
지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어젯밤 꾸었던 악몽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거대한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꿈. 그 속에서 그녀는 별이를 필사적으로 불렀지만, 별이의 모습은 희미한 메아리로만 흩어졌다.
“네가… 어떻게 알았어?” 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는 수많은 계절을 넘겼고,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으니.” 별이의 목소리에는 변함없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꿈은 가끔 미래를 비추기도 하지만, 대개는 내면의 두려움을 드러낼 뿐이야.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지, 지혜?”
지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어제는 골목 어귀의 작은 책방이 문을 닫았고, 지난달에는 옆집 할머니가 영영 떠나셨지. 네가 가끔 찾아가던 그 빵집도 곧 없어진다고 해. 우리는 너무 오래 함께해서, 모든 변화가 더욱 크게 느껴져. 네가 언젠가 나를 떠나면… 아니면, 내가 변해서 너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게 될까 봐.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
별이는 가만히 지혜의 어깨에 기대었다. 부드러운 머리통의 온기가 불안했던 지혜의 마음을 천천히 녹였다.
“우리는 그저 시간을 함께 걸었을 뿐이야.” 별이가 말했다. “너는 길을 잃은 나를 보았고, 나는 외로운 너를 보았지. 서로에게 그림자가 되어준 시간이었어.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아.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도 생기지. 형태를 바꿀 뿐이야.”
별이는 고개를 들어 지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깊은 눈동자 속에는 오랜 세월의 지혜와 변치 않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사라지는 것들에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 그 안에는 새로운 시작이 숨어있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조각들이 어느 날 문득 새로운 그림을 완성하기도 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사이의 대화는… 네가 나를 믿는 한, 내가 너를 믿는 한, 결코 끊어지지 않아.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온 사이니까.”
지혜는 별이를 꼭 안았다. 따뜻하고 작은 몸뚱이에서 전해지는 생명력은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지만, 그것은 슬픔만은 아니었다. 안도감과, 그리고 희미한 희망이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꿈 속에서도, 너는 나를 불렀지, 지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를 잃지 않는 방법이야.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아무리 많은 것들이 우리 곁을 스쳐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서로를 부를 거야. 그 목소리가 닿는 한, 우리는 영원히 길을 잃지 않을 테니.”
별이는 지혜의 품에서 조용히 골골거렸다. 그 진동은 지혜의 가슴 속 깊이 파고들어, 불안했던 마음의 균열을 메워주었다. 창밖의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하루가 저물고, 또 다른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에도, 그들의 대화는 계속될 것이었다.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기에, 그들은 어떤 그림자도 두렵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