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551화

별빛 아래 서성이는 약속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창밖으로는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를 흩뿌려 놓은 듯, 은하수가 그 거대한 팔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밤하늘치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았죠. 아마도 이런 날에는 도시의 불빛조차 겸손히 물러서는 모양입니다. 스튜디오의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별들을 한참 바라보다 마이크를 켰습니다.

“안녕하세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지우입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이 밤, 어디에 계시든, 무엇을 하고 계시든, 이 전파가 당신의 귓가에 닿기를 바랍니다. 유난히 별이 빛나는 밤에는, 문득 잊고 지냈던 어떤 약속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지키지 못해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약속, 혹은 그 약속 덕분에 오늘까지 힘을 얻고 살아가는 약속들 말이죠. 오늘은 한 통의 사연으로 그 별빛 약속들을 함께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오래된 편지 한 통을 집어 들었습니다. 얇은 종이 위에는 조심스러운 필체로 ‘별빛소녀’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DJ 지우님, 안녕하세요. 저는 어릴 적 별 보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별빛소녀’입니다. 오늘 밤 하늘을 올려다보니, 문득 오래전 약속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요. 여름방학, 옥상에서 작은 라디오를 들으며 별자리를 찾고 있었어요. 낡은 플라스틱 라디오에서는 유행가와 함께 잡음이 섞여 나왔죠. 그때, 옆집에 새로 이사 온 동갑내기 남자아이를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준’이었어요. 저와 달리 말이 없고 늘 혼자였지만, 별을 향한 눈빛만큼은 저보다 더 뜨거웠던 아이였습니다.

하준이는 제게 망원경도 없이 맨눈으로도 수많은 별똥별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저는 그에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소개해주었어요. 우리는 매일 밤 옥상에 올라가 함께 별을 보고, 라디오를 들었죠. 어느 날, 하준이가 제 손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쥐여주며 말했어요. “이 돌멩이는 내가 오늘 찾은 별똥별이야. 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 아주 특별한 혜성이 올 거야. 그 혜성을 찾으면, 우리 다시 이 라디오를 들으며 꼭 만나자.”
하지만 하준이네는 그 해 가을, 갑자기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아무런 인사도 없이요. 저는 그 돌멩이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매일 밤, 그 혜성을 기다리며 이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듣습니다. 언젠가 그 혜성이 나타나고, 라디오에서 하준이의 이름이 불리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요.

편지를 다 읽고 잠시 침묵했습니다. ‘별빛소녀’의 사연은 제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하준이와 ‘별빛소녀’처럼, 저에게도 별빛 아래서 나눈 특별한 약속이 있었으니까요.

소년의 별, 잊히지 않는 주파수

저 역시 초등학생 시절, 여름방학만 되면 옥상에 박혀 살던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저의 유일한 친구는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밤하늘의 별들이었죠. 손때 묻은 라디오는 잡음 속에서도 제가 듣고 싶은 노래들을 기어코 찾아내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평소처럼 옥상에 올라가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데, 저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이 낡은 천체망원경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준’이었습니다. 동네에서는 조금 별난 아이로 통했죠. 늘 혼자였고, 말수가 적었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나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각자의 밤을 즐겼습니다. 그는 망원경으로 별을 탐색했고, 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끊겼습니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이었죠. 저는 아쉬운 마음에 라디오를 끄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때 준이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어요.

“이게 뭐야?” 제가 물었습니다.

그는 스케치북 한 페이지를 찢어 제게 건넸습니다.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그려진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내가 찾은 별이야.”

“네가 별을 찾았다고?” 저는 믿기지 않아 눈을 깜빡였습니다.

“응. 언젠가 나는 저 밤하늘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나만의 별을 찾을 거야. 그리고 그 별을 제일 먼저 너에게 보여줄게.” 준이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말 속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약속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제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네가 이 별과 똑같은 별을 찾으면, 이 주파수를 맞춰봐. 내가 듣고 있을 거야.” 그는 제 낡은 라디오를 집어 들고는, 거의 들리지 않는 작은 숫자들을 조심스럽게 다이얼에 새겼습니다. 흐릿하게 보였지만, 91.9MHz라는 숫자가 보였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우리는 옥상에서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고,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그는 제게 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저는 그에게 라디오에서 나오는 멜로디를 흥얼거렸죠. 하지만 그 여름이 지나고, 준이네 가족도 말없이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그는 제게 약속했던 별 그림 한 장만을 남긴 채 말이죠.

저는 그 별 그림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닳고 닳아 희미해졌지만, 그날 밤의 공기와 준이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새겨준 주파수 91.9MHz. 그것은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진행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별빛 약속의 메아리

‘별빛소녀’의 사연을 들으며, 그리고 저의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별빛 약속들을 주고받을까요? 어떤 약속은 시간과 함께 희미해지고, 어떤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약속들이 우리 마음속에 남긴 반짝임이 아닐까요?

‘별빛소녀’에게 하준이와의 약속이 그랬을 것이고, 저에게 준이와의 약속이 그랬습니다.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그 순간의 순수한 마음과 공유했던 꿈은 우리를 계속해서 나아가게 하는 작은 별이 됩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빛나고, 우리는 그 별을 보며 누군가를 기억하고, 희망을 품습니다.

어쩌면 하준이도, 준이도, 지금 이 밤 어딘가에서 별을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와 같은 주파수에 귀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르죠.

저는 잠시 멈췄던 시그널 음악을 다시 재생했습니다. 잔잔하면서도 아련한 멜로디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오늘 밤은 ‘별빛소녀’님의 사연과 저의 오래된 기억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음에 품고 있는 별빛 약속이 있으신가요? 그것이 첫사랑과의 풋풋한 약속이든, 친구와의 진한 우정의 맹세든, 혹은 자신과의 은밀한 다짐이든 상관없습니다. 그 약속을 떠올리며, 오늘 밤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저는 테이블 위의 별 그림을 조용히 만져보았습니다. 언젠가, 저 밤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발견하면, 그 별빛이 이 주파수를 타고 누군가의 귓가에 닿기를 바라면서요.

“오늘 밤 신청곡은, 여러분의 별빛 약속을 떠올리게 할 만한 곡으로 준비했습니다. 다들 평안한 밤 되세요. 저는 내일 밤 같은 시각, 같은 주파수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마이크를 끄고, 저는 다시 창밖의 별들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수많은 별들이 저마다의 약속을 품고 고요히 빛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