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548화

그 해 겨울의 마지막 찻잔

지은은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통지서를 움켜쥐었다. 희미한 묵향이 스며든 종이 위로, 법률 용어들이 차갑게 얼어붙은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설화당’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인장 아래, 폐업과 철거라는 잔인한 문구들이 고딕체로 위협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20년, 아니, 할머니의 대부터 따지면 60년이 넘는 세월이 고스란히 깃든 이 공간이, 이제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창밖으로는 잿빛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올겨울 들어 유난히 눈이 귀했다. 첫눈이 소리 없이 내리던 날, 현우와 이곳에서 마주앉아 따뜻한 차를 나누던 기억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때도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그녀는 그의 그림자를 애써 외면했었다. 그날 나눈 짧은 대화가,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의 서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그녀의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렇게는 안 돼… 절대…”

메마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지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는 틱, 톡, 무심하게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이대로 설화당을 잃는다면, 그녀의 삶의 의미마저 송두리째 뽑혀 나갈 것 같았다. 할머니의 온기,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현우와 공유했던 수많은 추억들이 모두 이 공간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 겨울날, 현우가 흐드러지게 내리던 눈꽃을 배경으로, “이곳을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라고 속삭이던 그 약속이, 이젠 부서진 거울 조각처럼 산산이 흩어져 버린 듯했다.

갈대밭에 부는 칼바람

같은 시각, 도시 외곽의 황량한 갈대밭에서는 현우와 서진의 날 선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갈대들을 격렬하게 흔들었고, 그들의 목소리 또한 바람에 실려 날카롭게 부딪혔다.

“현우 씨, 이제 와서 이러는 건 좀 우습지 않습니까? 모든 절차는 이미 마무리 단계예요. 당신이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는 설화당, 이제 곧 내 손에 넘어올 겁니다.” 서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승리감과 함께 오래된 앙금이 서려 있었다.

“서진아, 부탁이다.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좋다. 설화당만은… 지은이에게서 빼앗지 마라. 네가 원하는 대가는 무엇이든 맞춰줄게.” 현우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듯했으나,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서진은 현우를 비웃었다. “하, 현우 씨가 저에게 ‘부탁’을 하는군요. 놀랍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저에게 명령만 했었죠. 그런데 대가라… 설화당 따위가 나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건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에요. 이건… 응당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당신과 지은이, 두 사람이 내게 저지른 모든 것에 대한.”

“아니… 내가 너에게 그랬지, 지은이는 아무 잘못 없어. 모든 건 나 때문이야. 그때 내가 너에게 솔직했어야 했다. 내 어리석음이 이렇게 큰 상처를 줄 줄은 몰랐어.”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회한과 자책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서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솔직했어야 했다? 이제 와서? 당신이 나를 기만하고, 뒤로는 지은이와…! 그래, 그때부터 모든 게 시작됐어. 설화당? 그저 시작에 불과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거야, 현우 씨.”

그 순간, 현우는 품에서 낡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서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에서 꺼낸 것은 빛바랜 계약서 한 장과 할머니의 필체로 쓰인 듯한 유언장이었다. 그의 눈이 글자를 따라 움직이자, 서진의 얼굴에서 비웃음기가 사라지고 경악이 서렸다. 계약서에는 설화당의 토지 소유권이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 서진의 회사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으나, 유언장에는 그 조건이 *’현우가 지은과 백년해로 할 경우’* 무효가 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남긴, 현우와 지은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상상치 못한 유산이자, 동시에 서진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내용이었다.

뜻밖의 목격자

지은은 절박한 마음으로 혹시나 하는 희망을 안고 설화당 등기부등본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법률 사무소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차가운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실망감에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현우와 서진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법률 사무소의 한적한 복도 끝에서 격렬하게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그들에게 다가간 지은은, 우연히 열린 문틈으로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서진이 현우가 내민 서류를 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할머니가, 이런 내용을… 감히 나를 이렇게 농락해? 현우 씨, 당신은 이걸 알고 있었던 겁니까?”

“알고 있었어. 그래서 너와 협상하려 했던 거야. 할머니는,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되돌아가길 바라셨던 것뿐이야. 설화당을 지키면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현우의 목소리는 애초의 비굴함과는 달리 단호하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행복? 당신은 나의 행복을 짓밟고 지은이와 행복하겠다고? 웃기지 마! 이 계약서 무효로 만들려면, 결국 당신과 지은이가 결혼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게 당신의 진짜 목적이었나? 설화당을 빌미로 지은이를 잡으려고?” 서진의 비난이 거세게 현우를 후려쳤다.

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니. 나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그 해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지은이에게 내가 했던 약속. 설화당을 지켜주겠다는 그 약속. 그리고… 네게, 네가 상처받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까지도.”

지은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현우가 자신에게 했던 약속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설화당을 지켜주겠다는 그의 맹세. 하지만 서진에게도 약속을 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혼란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현우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왔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미처 알지 못했던 더 깊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다시 내리는 눈꽃

발소리에 두 남자는 동시에 문 쪽을 돌아봤다. 지은은 더 이상 숨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현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현우의 얼굴은 당황과 후회, 그리고 체념으로 얼룩져 있었다.

“지은아…” 현우의 목소리가 닿기도 전에, 지은은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약속… 대체 무슨 약속을… 서진 씨에게도…?” 지은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맺힌 눈물로 흐릿해지고 있었다.

현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은아, 그건… 오해하지 마. 내가 설명할게. 모든 걸… 그때 그 눈 내리던 날부터.”

하지만 지은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까? 아니면 현우가 그녀를 위해, 혹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이 모든 희생을 감수해왔던 것일까? 그녀의 머릿속은 수많은 질문들로 가득 찼고, 그녀는 도망치듯 법률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하얀 눈송이들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마치 그 해 겨울,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날처럼. 설화당을 지켜주겠다는 약속, 그리고 또 다른 알 수 없는 약속들. 눈꽃은 끝없이 내렸고, 지은의 발자국 위로 소리 없이 쌓여갔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차가운 눈꽃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이 모든 눈꽃들이 녹아내릴 때쯤, 그녀는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진실은… 그 약속은… 과연 그녀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