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세상을 하얗게 지우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구름은 하늘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고, 창문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는 마치 오래된 이야기의 서문을 읊조리는 듯했다. 병실 안은 훈훈했지만, 지후의 마음속에는 한겨울의 찬바람이 일렁였다. 침대에 누운 할머니 서연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그 고요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할머니, 또 눈이 와요.”
지후는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눈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손을 감쌌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손은 차갑고 작았다. 할머니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지만, 그 눈빛은 먼 과거의 풍경을 헤매는 듯 아득했다.
“응, 눈… 그날도 이렇게 눈이 왔었지…”
할머니의 목소리는 스치는 바람처럼 약했다. 그날. 지후는 그 ‘그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평생을 품고 살아온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수백 번의 겨울이 오고 가는 동안, 그 약속은 할머니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굳건한 기둥이었다.
오래된 상자 속의 메아리
며칠 전, 할머니의 오래된 서랍장을 정리하다가 지후는 낡은 목함 하나를 발견했다. 자개로 장식된 빛바랜 상자 속에는 마른 라일락 꽃잎과 함께 닳고 닳은 손수건, 그리고 누렇게 변색된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할머니와 늠름한 젊은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배경은 온통 눈으로 덮인 벌판이었고, 그들 뒤로는 유난히 우뚝 솟은 소나무 한 그루가 겨울의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상자 바닥에는 조그만 글씨로 ‘그날의 약속, 소나무 아래서’ 라고 적혀 있었다. 지후는 그 사진을 들고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이 분은 누구세요?”
할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흐릿했던 시선이 순간 또렷해지며 사진 속의 젊은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나의 겨울이었지. 그리고 봄이었고, 여름이었어…”
할머니는 말끝을 흐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할머니는 더욱 자주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소나무’, ‘약속’, ‘기다림’. 의사는 할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마지막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남은 유일한 바람은, 그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임을 지후는 직감했다.
지후는 사진 속의 소나무를 찾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수십 년 전의 풍경을 담은 사진 한 장만으로는 막막했다. 할머니의 기억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고, 온전한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
밤늦도록 노트북 앞에 앉아 지도를 살폈다. 오래된 지명들을 검색하고, 옛 사진들을 대조하며 소나무가 서 있었을 법한 장소를 추적했다. 할머니의 고향은 이미 도시 개발로 인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강이 흐르고 언덕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밭이었던 곳은 공원이 되었다. 하지만 사진 속 소나무는 주변의 풍경과는 이질적으로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혹시 그 소나무만은 아직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지후는 놓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오래된 지역 신문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60년 전, 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공원 조성 계획에 대한 기사였다. 기사 속에는 ‘지역의 상징과도 같은 노거수(老巨樹)인 수백 년 된 소나무를 보존하며 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지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 노거수가 할머니 사진 속 소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기사에서 언급된 공원의 현재 이름은 ‘평화누리공원’이었다. 지후는 곧장 지도 앱을 켜서 평화누리공원을 검색했다. 그리고 공원 한가운데, 유난히 크게 표시된 나무 아이콘을 발견했다. 나무의 이름은 ‘천년 소나무’.
거기였다. 할머니의 약속이 시작되었던, 그리고 끝나지 않은 그 장소.
폭풍 전야
다음 날 아침, 창밖으로 눈은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기상청에서는 종일 대설주의보를 발령했고, 오후부터는 한파와 함께 폭설이 예상된다고 했다. 병실에는 차가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할머니의 상태는 밤새 더 악화되었다. 가느다란 호흡은 더욱 힘겨워 보였고, 창백한 얼굴에는 미미한 경련의 흔적마저 보였다.
“할머니, 제가 다녀올게요. 할머니의 약속, 제가 지켜드릴게요.”
지후는 할머니의 곁에 앉아 나지막이 속삭였다. 할머니는 희미하게 눈을 떴지만, 초점 없는 눈빛은 지후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 순간, 지후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평화롭게 해주고 싶다는 일념이 그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매서운 칼바람이 지후의 뺨을 때렸다. 눈은 앞을 가릴 정도로 퍼부었고, 도로는 이미 흰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버스나 지하철은 지연 운행 중이었고,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평화누리공원까지는 차로 30분 거리. 걸어서는 한참을 가야 할 거리였다.
지후는 망설이지 않았다. 차를 포기하고, 눈보라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터운 패딩 모자를 눌러쓰고, 장갑을 낀 손으로 할머니의 사진과 작은 손수건이 든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발밑의 눈은 푹푹 빠졌지만, 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의 약속을 향한 간절함이 그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이 시리고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휴대폰은 눈에 젖어 먹통이 된 지 오래였다. 표지판마저 눈에 덮여 길을 잃을 뻔했지만, 지후는 본능적으로 공원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수많은 발자국이 눈 위에 사라지고 새로 생기기를 반복하는 동안, 지후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할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제가 갈게요.’
천년 소나무 아래서
마침내 평화누리공원의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공원 안은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새하얀 눈밭 위에 지후의 발자국만이 유일한 흔적을 남겼다. 이정표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을 때, 저 멀리 거대한 그림자가 눈보라 속에서 위용을 드러냈다.
천년 소나무.
사진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 세월을 견딘 굵은 가지들은 눈꽃을 잔뜩 매달고 있었고, 굽이진 줄기는 묵묵히 서서 수많은 계절을 지켜본 듯했다. 지후는 소나무 아래에 다다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머니에서 할머니의 사진과 손수건을 꺼냈다.
“할머니… 여기 왔어요.”
지후는 소나무의 거친 줄기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나무껍질의 감촉이 할머니의 손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지후의 귓가에 할머니의 흐릿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이 소나무 아래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지. 그때까지 우리 꼭, 서로를 잊지 말자고…”
그는 할머니가 평생을 기다려온 약속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어쩌면 할머니는 이 소나무 아래에서 수많은 겨울을 홀로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지후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차가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와 소나무 가지에 쌓여있던 눈을 후드득 떨어뜨렸다. 마치 소나무가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혹은 그 약속의 메아리가 바람을 타고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지후는 그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천년 소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눈꽃들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키는 듯했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할머니의 손수건과 함께 놓여있던 낡은 종이 한 장이 바람에 휘날려 땅에 떨어졌다. 사진 뒷면에 감춰져 있던, 빛바랜 편지였다. 할머니의 약하고 떨리는 글씨체로 쓰여진 편지. 지후는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눈에 젖어 번질까 조심스럽게 펼쳐든 편지에는 마지막 한 문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만약 그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 편지를 읽어주렴. 그리고 네가 대신 이 약속을 완성해 주렴. 나의 지후에게.”
지후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걸까. 자신이 끝내 그 약속을 직접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그 마지막 임무를 맡기려 하셨던 걸까.
그는 편지를 품에 꼭 안고 고개를 들어 소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눈보라는 더욱 거세져 시야를 가렸지만, 천년 소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지후는 그 나무 아래에서, 할머니의 약속을 대신 지키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이 약속은 할머니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속에, 새로운 약속의 씨앗이 심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약속은, 할머니가 평생을 기다려온 그이를 대신해, 지후 자신이 이제부터 지켜가야 할 삶의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