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561화

새하얀 눈이 세상을 덮었다. 간밤부터 쉬지 않고 쏟아진 눈은 도시의 모든 소음을 먹어치운 듯 고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은주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평온함도 자리하지 못했다. 오히려 눈꽃송이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창가에 서서 뿌연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이름을 썼다가 지웠다. 지훈. 그 이름 석 자가 불러일으키는 파도는 지난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거셌다. 10년 전, 바로 이런 눈이 내리던 날, 그녀는 지훈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약속을 했다. 아니, 사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겠다는 잔인한 결별의 약속이었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었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손목시계는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이 한 시간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바닥 안에는 낡은 주머니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10년 전, 지훈이 선물했던 작은 돌멩이들이 담긴 주머니였다. 당시 지훈은 말했었다. “이 돌멩이들처럼 굳건히 서로를 사랑하자. 어떤 시련이 와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 약속은 그녀의 선택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지훈의 가문이 휘말린 치명적인 스캔들을 막기 위해, 그녀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그를 떠나야만 했다. 그 선택이 지훈에게는 단순한 배신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녀를 증오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지훈은 그녀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지러 온다 했다. 이 지긋지긋한 인연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은주는 그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지난 10년 동안 수없이 밤을 새워 고민했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진실을 말하면 그를 지키려 했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고, 침묵하면 그는 영원히 그녀를 오해한 채 살아갈 것이다.

차가운 공기가 방안을 채웠다. 난방을 하지 않은 채였다. 마치 자신의 심장이 얼어붙은 것처럼, 몸의 감각 또한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기억이 눈발처럼 흩날리며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흩날리는 기억의 조각들

“은주야, 우리 헤어지자.”

그날,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지훈에게 비수였다. 그의 눈에 비치던 배신감과 상처는 아직도 생생하게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서 걸어갔다. 내리는 눈송이가 그의 어깨 위에 쌓이는 모습은 마치 그의 영혼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는 오열을 삼켰다. 차라리 그녀가 사라지는 것이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이후로 10년. 그들은 우연히 몇 번 마주쳤지만,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지훈은 그녀를 볼 때마다 혐오와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볼 때마다 은주는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지 다시금 깨달았다. 하지만 죄책감보다 더 깊은 것은, 그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안도감이었다.

최근, 지훈의 약혼 소식이 들려왔다. 명망 있는 가문의 영애와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은주는 미친 듯이 웃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울었다. 자신이 그를 위해 감당했던 모든 고통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 같았다. 그는 이제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다. 그녀는 이제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지훈에게서 온 한 통의 전화로 산산조각이 났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단 한 번만. 그리고 당신과는 영원히 끝낼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한 줄 알았던 그녀의 마음에 다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약속, 그리고 진실의 문턱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 어느덧 약속 시간 5분 전이었다. 은주는 낡은 코트 자락을 여미고 집을 나섰다. 발밑의 눈은 푹신했지만, 그녀의 걸음은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무거웠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는 10년 전, 그가 돌멩이를 건네며 영원을 약속했던 그 벤치였다.

벤치에 가까워질수록, 멀리서 벤치에 앉아 있는 지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어깨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10년 전의 그날처럼. 그의 옆모습은 여전히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깊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은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가 벤치 앞에 섰을 때, 지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10년 전과 변함없이 복잡했다. 슬픔, 분노, 그리고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뒤섞인 눈빛.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것은, 답을 갈구하는 듯한 처절한 질문이었다.

“왔군요.”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네.” 은주는 겨우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떨렸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는 낡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것, 기억합니까? 당신이 내게 버리고 간 것들입니다. 10년 동안, 나는 이것들을 볼 때마다 당신이 왜 내게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대체 왜… 날 버리고 갔습니까?”

그의 마지막 질문은 절규에 가까웠다. 은주는 눈을 감았다. 따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운 눈발이 뺨을 스치며 눈물과 섞였다. 그녀는 이제 선택해야 했다. 영원히 그를 오해 속에 가둘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진실을 고할 것인가.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지훈이 내민 주머니와 자신의 주머니를 나란히 쥐었다. 10년 만에,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훈아…” 그녀의 입술에서 오랜 시간 억눌렸던 이름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질 말은, 그들의 모든 것을 바꿀 것이었다. 눈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이제야 그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