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44화

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희미한 달빛만이 아파트 단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지은은 손에 든 낡은 일기장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갈색 가죽 표지는 할머니의 거친 손길과 지은의 조심스러운 손길을 번갈아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번 일기장을 덮었을 때 느꼈던 먹먹함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지은은 천천히 새로운 페이지를 넘겼다.

날짜는 1953년 9월 15일.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 모든 것이 혼란과 절망 속에 뒤엉켜 있던 시절이었다. 그 페이지는 유난히도 종이의 질감이 거칠었고, 잉크의 색깔 또한 다른 날들보다 바래 있었다. 할머니의 필체는 초반에는 정돈된 듯 보였으나, 이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글을 쓰는 내내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 것처럼.

가을 햇살 아래, 잊혀진 꿈

지은은 마른침을 삼키며 할머니의 글을 따라 내려갔다.

“오늘 아침, 햇살이 병든 풀잎 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이 어찌나 곱던지, 망가진 다리 옆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조차 아름다워 보였다. 붓을 들고 싶었다. 그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두고 싶었다. 내 손끝에서 캔버스 위에 고운 색이 물들고, 세상의 추함 속에서도 빛나는 진실을 담아내고 싶었다.”

할머니는 늘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느라 평생을 바쳤던 강인한 어머니이자 할머니였다. 그녀의 손은 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과 닳아빠진 바늘을 쥐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이토록 섬세하고 예술적인 감수성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은 지은에게 언제나 놀라움과 함께 깊은 경외감을 안겨주었다. 일기장을 통해 할머니의 청춘을 들여다볼 때마다, 지은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다른 얼굴을 마주하곤 했다.

글은 계속되었다.

“김 교수님은 내 그림을 보시고 ‘이 아이의 손끝에는 슬픔과 아름다움이 함께 깃들어 있구나. 전란의 아픔 속에서도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칭찬하셨다. 전쟁이 끝나면 작은 화실이라도 얻어 그림만 그리며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은 언제나 붓끝에 매달려 있었다. 나의 세상은 캔버스 위에서만 온전하고 찬란했다.”

지은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할머니가 미술에 깊은 소질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처럼 구체적으로 그 꿈을 엿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며 희망을 놓지 않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문단에서 할머니의 필체는 더욱 흔들렸다. 잉크가 번진 자국은 마치 할머니의 눈물이 종이 위에 스며든 듯 보였다.

“하지만, 그 꿈은 오늘, 깨어졌다. 동생이 심하게 앓는다. 약값조차 구할 길이 없다. 아버지는 전쟁통에 모든 것을 잃으시고, 이젠 밭일을 나갈 기력마저 잃으셨다. 어머니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신다. 나라도 나서야 했다. 내 손에 붓 대신 쟁기를 쥐어야 했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그림은 사치에 불과했다. 나는 화가이기 이전에, 딸이고 누나였다.”

책임의 무게, 희생의 그림자

지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할머니의 필체에서 느껴지는 절망감, 포기해야만 했던 꿈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가족을 위한 희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붓 대신 쟁기를 쥐어야 했다는 그 문장 하나에, 할머니의 모든 청춘과 꿈이 꺾이는 순간이 담겨 있었다.

“붓을 상자에 넣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유화 물감 냄새가 내 손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다시 붓을 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내 안에 있던 모든 색깔들이, 그렇게 흑백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가족을 살리는 일. 그 어떤 그림보다도 소중한 일. 나는 그렇게 내 꿈을 묻었다. 깊은 땅속에, 아무도 찾지 못하게.”

그 이후 할머니는 다시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은이 기억하는 할머니는 늘 강하고 억척스러웠다.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앉아 억척스럽게 물건 값을 깎던 할머니, 자식들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밥을 먹이려 애쓰던 할머니. 그 모습 뒤에, 이토록 찬란한 꿈을 품고 살았던 한 예술가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지은은 일기장을 덮었다.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벽에 걸린 낡은 액자를 응시했다. 그 속에는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담겨 있었다. 젊은 시절의 할머니였다. 뻣뻣한 모시 치마를 입고 마른 손으로 갓난아기 동생을 안은 채,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웃고 있는 스무 살의 할머니. 그 사진 속 할머니의 눈빛은 비록 고단해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깊은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은은 이제야 그 슬픔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희생해서 가족을 지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빛나는 재능과 열정을 뒤로하고 생존을 위한 삶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 선택이 할머니의 삶에 얼마나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을지를 지은은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지은은 자신의 책상 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현재 작업하고 있는 디자인 스케치북, 컴퓨터 모니터에 펼쳐진 화려한 색감의 시안들. 그녀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자유와 기회는, 어쩌면 할머니와 같은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어왔다. 지은은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품에 안고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일기장은 더 이상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강을 건너온 할머니의 숨결이자, 잊혀진 꿈들의 무덤이었으며, 동시에 지은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 같았다. 할머니의 묻혀진 꿈은, 이제 지은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색깔로 피어나고 있었다.

다음 장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지은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또 어떤 깨달음을 줄지 조용히 기대하며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