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579화

차가운 진실의 무게

새벽녘, 고요한 병실 창밖으로 첫눈이 흩날렸다. 창문 턱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은 한없이 순결해 보였지만, 현우의 가슴속엔 차가운 진실의 무게가 얼음처럼 박혀 있었다. 서연은 여전히 침대 위에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창백한 뺨에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그의 손은 그녀에게 닿기엔 너무 많은 과거의 흔적을 짊어지고 있었다.

어젯밤, 민준이 전해준 낡은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현우와 민준, 그리고 또 한 명의 소녀가 눈밭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소녀의 모습은 서연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리고 사진 뒷면에는 낡은 글씨로 새겨진 문장.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 혜인, 현우, 민준.”

혜인. 잊으려 애썼던 이름이 그의 뇌리에서 고통스럽게 울렸다. 혜인은 10년 전 그날, 눈 쌓인 산길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현우의 첫사랑이었다. 서연과 혜인의 닮은 모습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잔인한 운명의 장난일까. 그리고 민준은 왜 이제 와서 이 사진을 건넨 것일까.

민준의 그림자

복도 끝에서 차가운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궁금할 텐데. 서연 씨가 혜인이의 동생이라는 사실, 믿기지 않지?”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민준은 늘 그랬듯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슨 소리야.” 현우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혜인이 사고 이후, 그녀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어. 서연 씨는 그때 너무 어려서 언니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지. 아니, 기억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거야.” 민준의 말은 칼날처럼 현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혜인 씨의 부모님은 혜인 씨를 잃은 충격으로 서연 씨마저 잃을까 봐 두려워했어. 그래서 모든 기억을 지우려 했고, 서연 씨를 먼 친척에게 맡겨 길렀어. 그 사실을 아는 건 이제 나밖에 없어.”

현우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서연이 혜인의 동생이라니.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친동생을 사랑하게 된 운명의 아이러니. 그리고 지난 수개월간 서연이 겪었던 알 수 없는 악몽과 공황 발작의 원인이 어쩌면 잃어버린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나에게 왜 이제야 말하는 거지?” 현우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민준은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약속, 기억해? 혜인이를 지켜주기로 한 약속.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리고 이제, 혜인이의 마지막 흔적까지 지켜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그의 시선이 다시 현우에게로 향했다. “어쩌면 서연 씨는 잃어버린 언니의 기억을 되찾으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였을지도 몰라. 그리고 누군가는 그 기억을 막으려 했겠지. 너는… 그녀를 지킬 수 있겠어? 혜인이가 그랬던 것처럼, 서연이마저 잃는 상황을 막을 수 있겠냐고.”

얼어붙은 기억의 파편

현우는 다시 서연의 병실로 돌아왔다. 창밖의 눈은 더욱 거세졌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키려는 듯, 하얀 눈송이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현우는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서연아…”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사무치게 아팠다. “내가… 널 지켜줄게. 이번엔 반드시.”

그는 지난 모든 순간들을 되짚었다. 서연이 처음 나타났을 때 느꼈던 기묘한 친숙함, 그녀의 눈빛에서 읽었던 알 수 없는 슬픔, 그리고 그녀가 겪었던 이상한 증세들. 모든 것이 이제야 퍼즐처럼 맞춰지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사실은 과거의 아픔과 연결된 존재라는 잔인한 운명.

그때, 서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현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희미하게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는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은 채 허공을 헤맸다. 그녀의 입술이 간신히 움직였다.

“눈… 눈꽃…”

가냘픈 목소리가 병실에 울렸다. 현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녀가… 눈꽃을 기억하는 것일까?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혜인과 현우, 민준이 함께 했던 그 약속을 서연이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현우는 서연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차가운 진실과 잔인한 운명 속에서, 현우는 오직 하나의 결심을 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번에는 그녀를 지켜낼 것이다.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눈꽃처럼 흩날리며, 두 사람의 운명 위에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