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567화

찬 바람 속 그림자

지혜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덮었다. 가죽 표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손때로 반질거렸지만,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는 지혜의 심장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이 감정의 소용돌이는 좀처럼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박선영 여사. 온화하고 정정하시던 그분이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았던 비밀의 무게가, 고작 얇은 종이 몇 장을 통해 지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무엇인가를 위한 희생이었다. 무엇보다, 지혜의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만한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허공에서 춤추는 모습은 마치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영혼들 같았다. 지혜는 서늘해진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쌌다.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 같기도 했다. 이 혼란스러운 감각은 일기장의 마지막 구절, 흐릿한 잉크로 쓰여 있던 ‘내 아가, 부디 행복하렴…’이라는 문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가? 할머니에게는 지혜의 어머니 외에 다른 자식이 없었다. 혹은, 없어야만 했다.

멈춰버린 시간의 조각

일기장에는 젊은 시절 할머니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격동의 시대 속에서 김우진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운명처럼 만나 뜨겁게 사랑했고, 아이를 가졌다는 내용. 그러나 가난과 집안의 반대, 그리고 약혼자와의 정략결혼이라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할머니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택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 태어날 아이마저도 자신 곁에 둘 수 없었다. 일기장 속의 할머니는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아이를 떠나보낸 날을 기록했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누구의 품에서 자랐을까? 그리고 지금은 살아있을까?

지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이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수줍게 웃는 할머니의 옆에는, 짙은 눈썹과 우수에 찬 눈을 가진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김우진. 일기장 속 이름 그대로였다. 사진 속 할머니의 눈빛은 지금껏 지혜가 보았던 그 어떤 사진보다도 깊고 애틋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사랑의 결실이, 또 다른 이름으로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혜에게 낯선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그리움을 안겨주었다.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평생을 ‘선영 여사의 외동딸’로 살아온 어머니가 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충격은 지혜에게도 버거웠지만, 아마 어머니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진실일 것이었다. 지혜는 혼자서 이 비밀을 파헤쳐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할머니의 마지막 기록은 그 아이를 찾으려는 듯한 작은 흔적들을 담고 있었다. 희미한 지명, 오래된 여인숙의 이름, 그리고 한때 아이를 맡겼던 고아원의 이름까지.

오래된 사진 속의 눈물

지혜는 일기장과 사진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다. 할머니가 남긴 단서들은 너무나 희미하고 조각나 있었다. 7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흔적을 더듬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평생을 짓눌렀던 한과 지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뒤섞여 지혜를 움직였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피를 나눈 또 다른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말이다.

책상 서랍을 열어 오래된 서울 지도를 꺼냈다. 일기장에 언급된 ‘성동골’이라는 지명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지금은 완전히 재개발되어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진 동네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기장에는 그곳에 작은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가에 매일 찾아가 아이의 안녕을 빌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혜는 할머니의 글씨체에서 어린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절규를 읽어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할머니는 그 작은 우물가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을까.

지혜는 일기장 속 할머니의 글씨가 유독 흐릿하고 번져 있는 한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날짜는 1953년 겨울.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날 할머니는 아이를 고아원에 맡긴 뒤, 우물가에 앉아 김우진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남긴 것이라곤, 어머니가 직접 만든 작은 은목걸이 하나뿐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 목걸이에는 ‘선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그 목걸이가 이 모든 진실을 밝힐 유일한 실마리일지도 몰랐다.

숨겨진 길의 끝에서

다음 날 아침, 지혜는 일기장과 사진, 그리고 낡은 지도를 들고 집을 나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차가웠던 바람이 오늘은 제법 온화하게 느껴졌다. 마음속에 가득했던 혼란은 희미한 희망과 알 수 없는 결의로 바뀌어 있었다. 할머니의 흔적을 쫓아 도착한 곳은 성동골 옛 터였다. 높은 아파트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옛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혜는 일기장의 설명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재개발되기 전, 할머니가 아이를 맡겼던 고아원 터는 이제 공원 부지로 변해 있었다. 공원의 한쪽 구석에는 낡은 정자가 쓸쓸히 서 있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에는 그 고아원 옆에 작은 양장점이 있었다고 했다. 그 양장점 주인 아주머니가 가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지혜는 스마트폰으로 옛 지도를 검색하고, 주변 상가들을 훑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두리번거리던 그때, 공원 건너편 골목 초입에서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미옥 양장’.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듯 낡고 바랬지만, 글씨체만은 단정하고 견고했다.

지혜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할머니의 손이 이끌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낡은 종소리가 띠링 하고 울렸다. 안에서는 옅은 먼지 냄새와 함께 섬유의 향기가 희미하게 풍겼다. 백발의 노파 한 분이 돋보기를 낀 채 재봉틀 앞에 앉아 옷감을 다듬고 있었다. 지혜의 눈길이 그 노파의 목으로 향했다. 노파의 목에는 오래되어 은빛이 바랜 듯한 작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목걸이에는, 희미하게 ‘선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혜는 숨을 멈췄다. 할머니의 일기장, 그 모든 비밀의 길 끝에 서 있는 사람. 마침내 마주한 진실의 그림자 속에서, 지혜는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