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 – 제180화

최은희는 텅 비어가는 집의 한가운데, 마치 거대한 침묵의 섬처럼 우뚝 서 있는 낡은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창문 밖으로는 초가을의 쨍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집 안은 이별의 그림자로 이미 깊숙이 잠겨 있었다. 손때 묻은 나무 건반 위로 뽀얀 먼지가 내려앉아 시간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피아노는 그녀의 생애 전부를 함께 해온 가족과도 같았다. 칠순을 훌쩍 넘긴 은희에게, 이 집과 이 피아노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숨 쉬는 역사였다.

아들 준혁은 일찌감치 이사 업체와 모든 것을 조율해 놓았다. 은희가 새로운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가장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었다. 작고 아늑한 새집에는 이 육중한 피아노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었다. 준혁은 피아노를 기증하는 곳을 알아보거나, 중고로라도 팔아야 한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은희는 마른기침만 연신 토해내며 말을 돌리곤 했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이면 집이 새로운 주인에게 넘어가고, 이 피아노는 은희의 손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은희는 천천히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검게 빛바랜 의자를 빼내 앉자, 나무의 삐걱이는 소리가 오래된 관절처럼 아프게 울렸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조심스럽게 스쳤다. 온기가 사라진 건반들은 차갑고 딱딱했지만, 은희의 손끝은 그 차가움 속에서 수많은 기억의 온기를 찾아 헤매는 듯했다.

문득, 아주 오래전 어느 여름밤의 풍경이 눈앞에 선연히 펼쳐졌다. 어둠 속에서 등잔불만이 희미하게 빛나던 방, 그리고 그 불빛 아래 피아노에 앉아 있던 젊은 어머니. 해질녘 어머니는 매일같이 피아노 앞에 앉아 한 곡을 반복해 연주하곤 했다. 낮은 음성으로 흥얼거리는 노랫말은 어린 은희에게 더없이 포근한 자장가였다.

“반짝이는 별들아, 내 아가를 재워다오… 꿈나라로 데려가 다오, 곱디고운 아침이 올 때까지…”

그것은 어머니가 직접 만든 ‘별빛 자장가’였다. 가난하고 고단했던 시절에도 어머니는 피아노 건반 위에서만큼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법처럼 둔탁한 피아노에서 생명을 불어넣었고, 그 소리는 어린 은희의 마음을 잔잔히 어루만졌다. 은희는 어머니의 옆에 기대어 앉아 꾸벅꾸벅 졸았고, 피아노 소리는 그녀의 꿈속까지 따라와 온밤을 수놓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피아노는 한동안 침묵했다. 은희는 감히 건반을 누르지 못했다. 그 침묵 속에는 어머니의 부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은희도 어머니가 되어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작은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서툴지만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별빛 자장가’를 연주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이따금 들리던 울음소리가 피아노의 음색에 스며들었다. 그녀의 결혼식 날 친구들이 이 피아노 앞에서 축가를 불러주었고, 힘들 때마다 홀로 앉아 위로를 받기도 했다. 이 피아노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그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흡수해 온 영혼의 나무였던 것이다.

“엄마, 아직 안 가셨어요?”

준혁의 목소리가 조용한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은희는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창밖은 이미 노을에 물들기 시작했고, 피아노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준혁은 피아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어머니의 이런 고집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준혁아….”

은희는 목소리가 잠겼다.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는 단지 음표의 배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진 시간과 사라진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노랫말,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 남편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그녀 자신의 희미한 한숨까지. 모든 것이 피아노의 현과 건반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 피아노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건 자신의 일부를 뜯어내는 것과 같았다.

“엄마, 이제 정말 보내드려야죠. 새집에 둘 공간도 없고… 현실적으로 생각하셔야죠.”

준혁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이 피아노를 놓아주는 순간, 그녀는 평생을 지고 온 소중한 보따리를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은희는 떨리는 손으로 건반 하나를 눌렀다. 둔탁하지만 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른 건반, 또 다른 건반. 조각난 기억들이 흐트러진 음표처럼 튀어 올랐다. 어머니의 자장가 선율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준혁은 피아노 앞에 앉아 흐트러진 건반을 누르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어머니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피아노는 그저 물건이 아니라, 어머니의 지나온 세월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엄마, 저녁 식사는 나가서 할까요? 아님 뭘 시켜 먹을까요?”

준혁은 일부러 밝게 말하며 분위기를 전환하려 했다. 하지만 은희는 대답 없이 건반 위에서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끊어진 듯 이어지는, 마치 길을 잃은 듯 헤매는 선율이었다. 그것은 완벽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그 어떤 완벽한 연주보다 더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심장이 부르는 노래였다.

“준혁아… 엄마, 오늘 밤은 여기서 잘래.”

은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더없이 희미했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준혁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어머니의 마음을 읽어냈다. 마지막 밤, 피아노와 함께 이 집에서 보내고 싶은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알겠습니다, 엄마. 그럼 제가 이불이랑 베개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고… 따뜻한 차도 끓여 드릴까요?”

준혁은 조용히 응답하며 돌아섰다. 은희는 준혁의 뒷모습을 보며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혔다. 아들도 이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자랐고, 이 집에서 웃고 울었다. 그에게도 이 피아노는 추억의 조각일 터였다. 하지만 어른이 된 준혁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밤이 깊어졌다. 달빛이 창문을 넘어와 피아노 건반 위에 은빛으로 흩뿌려졌다. 은희는 피아노 의자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적막한 어둠 속에서, 낡은 피아노는 여전히 수많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음률, 보이지 않는 악보 속에서, 지난 세월의 목소리들이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건반을 어루만졌다. 이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는 단순한 곡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여인의 삶 전체, 한 가족의 역사, 그리고 결코 잊혀지지 않을 사랑의 선율이었다. 내일 아침,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 노래는 그녀의 가슴 속에 영원히 울려 퍼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