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동산은 아직 차가운 이슬을 머금고 있었지만, 봉우리 끝에 걸린 햇살은 이미 봄의 전령처럼 따스했다. 지호는 오래된 벤치에 앉아 저 멀리 아지랑이 피어나는 들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오백 육십 번이 넘는 봄이 왔다 지나갔건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겨울의 잔재가 남아있는 듯했다. 삼십 년 전, 그날의 비극이 그녀의 모든 계절을 삼켜버린 듯했다.
“또 그 생각에 잠겨 있었어?”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유진이었다. 손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보온병과 작은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지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바람이 너무 좋아서. 꼭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아.”
유진은 지호 옆에 앉아 벤치에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옅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변함없이 지호의 곁을 지키는 굳건함이 있었다.
“속삭이는 게 아니라, 이젠 제대로 들려줄 때가 됐다는 거겠지.”
유진의 말에 지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속에 어떤 예감이 실려 있는 듯했다. 지호는 차가 담긴 잔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가슴 저미는 바람
그때였다. 지호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낯선 번호였다.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소음과 함께,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호 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지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지만, 막상 닥치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오래전, 김해성 씨 사건과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김해성. 그녀의 입술에서 미처 다 부르지 못한 이름이었다. 잃어버린 동생, 지호가 평생을 찾아 헤맨 그림자 같은 존재. 삼십 년 전, 동생 해성은 작은 마을의 보육원에서 사라졌다. 당시 마을을 휩쓴 역병과 혼란 속에, 모든 것이 지워진 듯했다. 지호는 홀로 남겨져 해성의 흔적을 쫓아 평생을 살아왔다.
“아…네.”
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해외에서 제보가 들어와 조사를 진행하던 중… 이지호 씨와 일치하는 유전자 정보를 가진 분을 찾았습니다.”
해외. 유전자 정보. 그 단어들이 지호의 뇌리에 박혔다. 삼십 년의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온 폭포수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엄청난 무게의 당혹감이 먼저 밀려들었다.
“그… 그게 무슨…”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그분은 현재 ‘알리야 박’이라는 이름으로… 카스피아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교육 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카스피아. 지호의 머릿속에 낯선 지명이 스쳐 지나갔다. 동생이 거기 있다는 말인가? 살아있었다는 말인가?
수화기 너머의 여인은 계속해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지호의 귀에는 웅웅거리는 파도 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삼십 년의 기다림이 한순간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행복, 슬픔,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란이 뒤섞인 감정의 파도.
지호는 가까스로 통화를 마쳤다.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
“지호야, 괜찮아?”
유진이 다급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지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가득 차 있었다.
“유진아… 해성이가… 해성이가 살아있대…”
그녀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가늘었다. 유진의 얼굴에도 놀라움과 감격이 교차했다. 그녀 역시 해성을 찾기 위한 지호의 지난한 여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였다.
“정말이야? 어디에? 어떻게 된 거야?”
지호는 억지로 침착하게 통화 내용을 요약했다. 유진은 숨을 죽이며 들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두 여인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벤치 주변을 맴도는 봄바람만이 그들의 격정을 아는 듯 나뭇잎을 흔들었다.
“카스피아라니… 그렇게 먼 곳에…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된 걸까?” 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호는 눈을 감았다. 삼십 년 전, 어린 해성의 손을 놓치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역병으로 아수라장이 된 마을, 불길에 휩싸인 보육원, 그리고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던 그녀의 모습. 죄책감은 언제나 그녀의 심장을 갉아먹는 칼날이었다.
“나에게는… 단 한 번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어.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환희와 두려움이 공존했다. 해성이 살아있다는 사실은 기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녀가 평생 쌓아 올린 죄책감과 그리움의 탑을 송두리째 흔드는 일이었다.
새로운 봄의 시작
지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연초록 잎새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삼십 년 만에 찾아온 동생의 소식. 그것은 봄바람이 전해준 가장 값지고, 동시에 가장 혹독한 소식이었다.
“알리야 박… 카스피아…” 지호는 중얼거렸다. 낯선 이름과 낯선 지명이 더없이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유진은 지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두려워하지 마, 지호야. 이제 시작일 뿐이야. 네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답이 이제야 온 거야.”
지호는 유진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침잠해 있던 호수 같던 마음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지만, 그 파문은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려는 배의 돛을 부풀리는 바람이 될 터였다.
카스피아, 알리야 박. 그 이름 뒤에 숨겨진 삼십 년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동생은 지호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낯선 이가 되어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
지호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봄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봄바람은 그렇게, 그녀의 가슴속에 희망과 함께 미지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동산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내려가며, 지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고, 그 너머 어딘가에 그녀의 동생이 있었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아 떠나는 길. 이 봄의 끝에서, 지호는 과연 어떤 해후를 맞이하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