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47화

창밖은 이미 깊은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앙상한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른 잎새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고, 그 소리는 마치 지난 시간을 애도하는 작은 탄식처럼 들렸다. 미나는 습관처럼 따뜻한 찻잔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 너머로 회색빛 하늘과 삭막해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삭막함이 마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느껴져, 미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무릎 위에 웅크리고 있던 달이 고개를 들어 미나를 올려다보았다. 노란 호박색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깊은 이해와 알 수 없는 연륜이 담겨 있었다. 달은 작은 코를 킁킁거리며 미나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털끝 하나 스치는 미미한 접촉이었지만, 그 속에는 ‘괜찮니?’ 하고 묻는 듯한 따뜻한 진동이 담겨 있었다. 미나는 달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었다. 이 작은 생명체와의 ‘대화’가 시작된 지 벌써 꽤 많은 계절이 흘렀지만, 매번 그 시작은 언제나 달의 따뜻한 물음에서 비롯되었다.

“달아… 요 며칠, 마음이 좀 시끄럽네.” 미나는 중얼거렸다. 달은 ‘미야옹’ 하고 나지막이 답하며, 미나의 손에 뺨을 비볐다. 그르렁거리는 작은 진동이 미나의 손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졌다. 어쩌면 달은 그녀의 시끄러운 마음속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달의 눈빛과 몸짓을 통해 여과 없이 전달되고, 또 받아들여졌다.

최근 미나는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과거의 한 조각과 다시 마주해야 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림자였지만, 뜻밖의 계기로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의 선택에 대한 후회, 그리고 그로 인해 어긋나버린 인연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가을 끝자락의 스산한 바람처럼, 그 기억은 잊을 만하면 찾아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흐려진 경계, 선명해진 기억

“그때,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미나는 창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더 용기 있었더라면, 혹은 좀 더 이기적이었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달은 가만히 미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미나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았다. 달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미나의 어깨 위로 점프했다. 늘 그렇듯 가볍고도 안정적인 착지였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머리로 미나의 뺨을 살며시 밀쳤다. 그 행동은 마치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길에 대한 후회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지, 달아. 이미 지나간 일인데.” 미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달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달의 털에서는 햇살과 마른 풀잎, 그리고 미나가 뿌려준 고양이 샴푸 향이 섞인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그녀에게 언제나 안정감을 주었다. “그때의 나는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 지금의 내가 그 일을 되돌아본다 한들, 그 시절의 나에게 다른 답을 강요할 수는 없을 거야.”

달은 작게 ‘크르릉’ 소리를 내며 미나의 귀 밑을 혀로 핥았다. 그 촉감은 간지러웠지만, 동시에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위로가 되었다. 고양이의 혀는 까칠하지만, 달의 혀는 유독 부드럽게 느껴졌다. 아니, 미나의 마음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바람이 전하는 위로

바람이 한층 더 거세졌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한기가 미나의 목덜미를 스쳤다. 미나는 문득 어린 시절, 바람 부는 날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듣던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야기는 언제나 멀고 먼 과거의 일들로 시작해, 결국은 현재의 따뜻함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미나는 항상 지나간 슬픔도 결국은 현재의 행복을 위한 과정임을 배웠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그 지혜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았다.

“달아, 너는 후회라는 것을 아니?” 미나는 달의 귀에 속삭였다.

달은 미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듯한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은 마치 ‘삶은 후회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모든 생명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필연적으로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 포기된 가능성들이 때로는 후회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다.

미나는 달의 눈빛에서 그 진리를 읽었다. 달은 한 번도 과거의 선택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지금 여기’에 충실했다. 한 줄기 햇살 아래에서 만족스럽게 낮잠을 즐기고, 한 입의 사료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미나의 손길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것. 그것이 달의 삶이었다. 그 단순함 속에 모든 번뇌를 잠재우는 깊은 지혜가 있었다.

“그래, 달아. 너는 나에게 늘 지금을 살라고 말해주고 있구나.” 미나는 깨달았다. “지나간 일을 곱씹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너와 함께 느끼는 이 따뜻함을 소중히 여겨야지.”

그녀는 달을 품에 안았다. 달은 만족스러운 듯 편안한 자세로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미나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작지만 강한 생명의 리듬. 그 리듬이 미나의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창밖의 바람 소리는 여전히 쓸쓸했지만, 더 이상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미나는 차가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고, 달의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묻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달과 자신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달은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미나의 얼굴을 핥았다. 그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미나는 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신비로웠지만, 이제는 거기에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닌, 자신을 비춰주는 따뜻한 등불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작고 환한 등불.

늦가을의 해는 짧았고,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기울기 시작했다. 주홍빛 노을이 희뿌연 하늘에 번지며 마지막 온기를 뿌렸다. 미나는 달을 안은 채 그 노을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저물어가고 새로이 시작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녀는 길고양이 달과의 대화가 선사하는 가장 값진 깨달음을 다시금 되새겼다. 바로, 순간의 충실함과 존재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문득, 미나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이토록 오랫동안 자신 곁에 머물러준 달은, 과연 무엇을 위해 자신을 찾아왔던 걸까. 혹은, 자신이 달을 통해 얻고 있는 이 모든 깨달음은, 달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나는 달의 등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또 다른 계절의 끝에서, 달과의 새로운 대화를 통해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