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기와지붕 아래,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한 작은 마을. 굽이굽이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김준호는 낡은 가죽 가방을 고쳐 맸다. 수백 번의 실패와 수천 번의 좌절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희미한 불씨 하나가 오늘따라 그의 심장을 더욱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182번째의 발걸음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그 익숙한 예감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수년 전, 서연이 즐겨 읽던 낡은 미술 잡지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 작은 메모. 잊힐 만하면 한 번씩 떠오르던 기억의 파편처럼, ‘도예가 고희준 선생의 초기 작품전’이라는 문구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연은 한때 직접 흙을 만지고 싶어 했다. 그 섬세한 손으로 빚어낼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그는 늘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 잡지가 발행된 시기와 서연이 홀연히 사라진 시기가 묘하게 겹쳐 있었다. 준호는 이제껏 수많은 우연과 직감을 따라 여기까지 흘러왔다. 이제는 그 직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작고 소박한 갤러리가 나타났다. 허름한 간판에는 ‘흙과 바람의 이야기’라는 손글씨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흙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섞인 아련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전시장 안쪽에서 가녀린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이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앉아 한 손에 돋보기를 들고 작은 도자기를 매만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준호의 목소리가 흙으로 빚어진 정적을 깨뜨렸다.
노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팬 눈가의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어쩐 일이신가요? 요즘은 발걸음 하는 이가 드문 곳인데.”
준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희준 선생님의 작품을 찾아왔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이 곳을 운영하시는 분이신가요?”
노부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고희준 선생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흙으로 돌아가셨지. 내가 그이의 아내요. 이 작은 공간은 그이의 흔적을 지키는 내 마지막 소임이랄까.”
준호는 숨을 고르고 본론을 꺼냈다. “혹시, 몇 년 전쯤 이 곳을 방문했던 젊은 여성을 기억하시는지요. 스물 중반쯤의 나이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조용하지만 눈빛이 무척 깊던 사람이었습니다.”
노부인의 눈빛이 멀리 과거를 응시하는 듯 흐려졌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랬지. 그런 아가씨가 있었지. 몇 년 전, 이 마을에 잠시 머물다 간 그림 그리는 아가씨.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 늘 검은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고, 흙을 만지는 일에도 흥미를 보였지. 말수는 적었지만, 손끝에서 피어나는 섬세함이 고희준 선생과 꼭 닮았었어.”
준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뜨거운 감각이 그를 휩쓸었다. ‘서연…!’
“그녀는, 여기서 그림을 배웠던 건가요?” 준호는 목이 메어 간신히 물었다.
“배웠다기보다는… 혼자서 그리고, 혼자서 흙을 주물렀지. 가끔 내가 옆에서 조언을 해주면, 금세 흡수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냈어. 참 재주가 많던 아이였지.” 노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옆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미완성된 작은 도자기 조각들이 몇 점 들어 있었다.
노부인은 그 중에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새 모양 도자기를 꺼내 들었다. 아직 유약조차 발리지 않은, 거칠지만 온기로 가득한 흙빛 새였다. “이걸 보게나. 저 아이가 떠나기 전에 남기고 간 것이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급히 떠났는지, 이대로 내 곁에 남아버렸어.”
준호는 떨리는 손으로 작은 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새의 가슴팍에 새겨진 작은 문양. 다른 사람은 알아보지 못할, 아주 작은, 그러나 준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흔적. 그것은 바로 서연이 어릴 적, 그림을 그릴 때마다 자신만의 서명처럼 남기곤 했던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기호였다. 은밀하고 섬세하며, 오직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오랜 세월의 갈증이 터져 나오듯, 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그 작은 흙덩이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기적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서연이, 여기에 있었다. 적어도 한때는.
“이 아이가… 이 새를 만들었던 게 확실합니다.” 준호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눈앞이 흐릿했다.
노부인은 따뜻한 시선으로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래 보였어. 그 아이는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눈을 가지고 있었지. 그리고 이 곳에서 잠시 평온을 찾은 듯 보였지만, 다시 또 어딘가를 향해 떠나야만 하는 운명처럼 보였어.”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지요?” 준호는 조급하게 물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노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는 모르네. 다만, 이따금 그 아이가 이곳 근처의 은방울꽃 수목원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나는군. 은방울꽃이 필 무렵이면, 그곳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었지. 숨겨진 아름다움이 자신과 닮았다고 했나? 잘 기억나지는 않는군. 갑자기 떠나버려서 더는 볼 수 없었어.”
은방울꽃 수목원. 준호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은 단서를 쫓았지만, 이토록 직접적인, 그리고 서연의 감성이 묻어나는 단서는 처음이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꺼져가던 희망의 불꽃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년의 시간, 수많은 도시와 얼굴들을 스쳐 지나며 쌓였던 피로가 일순간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준호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작은 흙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에게는 살아있는 온기처럼 느껴졌다.
노부인은 잔잔한 미소로 답했다. “젊은이가 그토록 애타게 찾으니, 필시 귀한 인연일 게야. 부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네.”
갤러리를 나서는 준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느리지 않았다. 낡은 가방 속 지도는 이미 은방울꽃 수목원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맨 기나긴 여정의 끝이, 마침내 지평선 너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그녀를 마주했을 때, 과연 그 오랜 세월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지. 그의 손에 들린 작은 흙새만이 대답 없는 질문들을 품은 채, 희망과 불안 사이를 오가는 그의 여정에 동행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