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이제 몇 장 남지 않은 마지막 권이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질 듯 얇아진 종이들은 할머니의 숨겨진 아픔만큼이나 연약해 보였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밤은 깊었고, 방 안은 스탠드 불빛 아래 먼지들이 느릿하게 춤추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금껏 읽었던 어떤 페이지보다도 잉크가 진했고, 글씨는 격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듯 거칠게 휘갈겨져 있었다.
1968년 늦가을, 정수에게.
당신이 떠난 지 어느덧 한 해가 다 되어가네요. 당신의 그림자조차 밟을 수 없는 이 고통은 영원히 내 몫이겠지요. 하지만 내 뱃속엔 이제 당신의 숨결이 자라고 있어요.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마치 닫힌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을바람처럼, 나는 이 비밀을 혼자 감당해야만 해요. 어미가 된다는 것은 이런 고통을 견디는 일인가요? 내 아이에게, 당신을 닮은 내 아이에게 나는 세상의 빛을 허락하면서도, 동시에 그림자를 드리워야만 합니다.
내 미영이… 내 사랑스러운 딸. 나는 너를 세상에 내보낼 수 없구나. 내 이름으로 떳떳이 널 안을 수 없구나. 내 아비의 품에서, 당신의 그림자를 지우고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니. 이 어미의 죄로 인해 네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겠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딸아. 하지만 이것이 너를 위한, 그리고 이 못난 어미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밤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요.
네가 태어나면, 나는 너를 언니의 품에 안겨줄 거예요. 그녀는 좋은 어미가 될 거예요. 나보다, 훨씬 더. 너는 그녀의 딸로 자랄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저 너의 이모가 될 거예요. 내 아이를 이모라 부르며 살아갈 나를, 신은 용서하실까요? 미영아, 부디 행복하게 자라렴. 네가 이 일기장을 발견하는 날, 이 어미의 어리석은 사랑을 부디 이해해주렴.
지우의 손에서 일기장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미영이.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처음으로 ‘미영’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그것도,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 내용이란…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할머니의 딸이 아니라, 이모의 딸이라고? 아니, 할머니의 딸이 맞지만, 이모의 딸로 살아가야 했다는 말인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할머니가 미영 할머니(그녀의 큰 이모이자 어머니를 키운 분)를 ‘언니’라고 칭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머니는 사실 할머니의 친딸이었고, 자신의 친외할아버지는 일기장에 언급된 ‘정수’라는 이름의 남자였다는 말인가? 충격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던 가족의 역사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늘 외할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하며 살아왔을 터였다. 아니,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할머니의 글은 마치 어머니가 언젠가 이 일기장을 읽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고백록 같았다. ‘네가 이 일기장을 발견하는 날…’ 그 문장이 지우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냄새가 비릿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평생을 사랑하는 딸을 딸이라 부르지 못하고, 이모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왔던 것일까? 그 고통의 깊이는 얼마나 되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자신의 뿌리를 모른 채 살아온 세월, 혹은 알고도 침묵했던 세월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할머니의 글씨체는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 슬픔은 50년의 시간을 넘어 지우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그녀는 이제 혼란스러움을 넘어선 비통함에 잠겼다. 이 진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리고 이 진실을 어머니께 어떻게 전해야 할까?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작은 엽서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낡고 바래어 색이 다 빠진 흑백 사진이었다. 앳된 얼굴의 할머니가 한 남자와 나란히 서서 웃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엽서 뒷면에는 잉크가 번진 글씨로 짧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정수에게. 잊지 않을게. 꼭 다시 만나.’
지우는 엽서 사진 속 남자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오래 전, 집안 어르신들의 결혼식 사진에서 언뜻 보았던, 그리고 최근에 돌아가신 작은 외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과 흡사했다.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이 혼란스러운 밤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지우는 잠든 어머니의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문 너머에서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롭게 잠들어 있을 터였다. 지우는 결심했다. 이 진실은 더 이상 묻어둘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알아야 했다. 이 모든 고통의 시작과 끝을.
새벽녘,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 지우는 낡은 일기장을 품에 안고 어머니의 방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는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진실의 문을 열 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