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회귀의 종착역
지우는 익숙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언제나처럼 따스했지만, 그의 심장을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옆 탁상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도시의 소음, 희미하게 코끝을 스치는 커피 향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그날’과 같았다. 그래, 또 그날이었다. 190번째의 ‘그날’.
손을 뻗어 베개 밑에 숨겨둔 낡은 회중시계를 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자,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더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 이제는 지우의 또 다른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계와 함께 그는 수백 번의 실패를 겪었고, 수백 번의 절망 속에서도 은서를 살리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매번 미세하게 달라지는 시간의 틈새 속에서, 지우는 퍼즐 조각을 맞추듯 그녀의 죽음을 막을 방법을 찾아 헤맸다. 오늘은 은서가 그 버스를 타지 못하게 하는 대신,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반지를 주기로 했다. 어쩌면 행복감에 젖은 그녀가 평소와 다른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 때문이었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날카롭고 피곤에 절어 있었다.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눈동자는 갈증에 시달리는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거울 속의 남자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난 수많은 회귀 속에서, 지우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의 기억은 조각난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고, 어떤 날은 자신이 은서와의 첫 만남조차 기억하지 못해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은서만 무사하다면. 그녀만 행복할 수 있다면.
약속 장소인 공원 벤치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쳤다. 늘 그랬듯, 그녀는 정확히 10시 5분에 나타났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은서는 햇살 아래 눈부셨다.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그의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유일한 등불이었다.
“지우 씨! 많이 기다렸어요?”
맑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방금 왔어.”
그녀는 지우의 옆에 앉았다. “지우 씨, 요즘 많이 피곤해 보여요. 무슨 일 있어요?”
그의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어딘가 이상했다. 지난번 회귀 때도, 그 전전번 회귀 때도 은서는 한 번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늘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그의 피곤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혹시, 이번엔…?
지우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떨쳐내며 주머니 속 반지를 움켜쥐었다. “아니야, 그냥 요즘 잠을 좀 설쳐서.”
은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요즘 지우 씨가 왠지 모르게 초조해 보여요. 꼭… 뭔가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지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가 어떻게 알지?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모르고, 그저 무고하게 이 모든 시간의 굴레에 갇혀 있을 뿐인데.
지우는 심호흡을 했다. “은서야. 할 말이 있어.”
그는 무릎을 꿇고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영롱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빛났다. 은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서야, 나랑 결혼해 줄래?”
은서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슬픔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지우는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맺혔다.
“지우 씨…” 그녀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몇 번째 여기에 있는 걸까요?”
지우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비틀거렸다.
“무슨… 무슨 말이야, 은서야.”
은서는 벤치에서 내려와 지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깊고, 너무나도 슬펐다.
“기억해요, 지우 씨? 처음엔 버스 사고였어요. 그 다음엔… 병이었죠. 또 그 다음엔… 교통사고를 피하려다 다른 사고에 휘말렸고요. 지우 씨는 매번 나를 구했지만, 나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지우 씨 앞에 나타났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지우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아무것도 몰라야 했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는… 매번 지우 씨의 초조함, 지우 씨의 절망을 느꼈어요. 매번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언제나 지우 씨의 곁에 있었죠. 하지만 매번, 지우 씨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어요. 과거의 은서와, 또 다른 과거의 은서와, 지금의 은서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나를 그저 구해야 할 존재로만 여겼어요.”
지우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회중시계가 그의 주머니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듯.
“이 시계는… 시계를 돌린 당신만을 되돌리는 게 아니었어요. 매번 새로운 평행우주를 만들어내고, 그 우주의 은서는… 당신이 겪었던 모든 회귀의 파편을 기억 속에 품게 돼요.”
은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우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나는 수많은 죽음을 겪었고, 수많은 삶을 살았어요, 지우 씨. 나는 더 이상 처음의 은서가 아니에요. 그리고 지우 씨도… 더 이상 처음의 지우 씨가 아니죠. 당신은 너무 많이 지쳐 있어요. 당신의 영혼은 너무 많이 닳아 버렸어요.”
지우는 그녀의 손길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수백 번의 회귀를 통해 그녀를 구하려 했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수백 번의 고통을 안겨준 셈이었다. 그녀는 그의 구원이 아니라, 그의 욕심에 의해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였던 것이다.
“제발… 제발 멈춰요, 지우 씨.” 은서는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는… 나를 놓아줘요. 그리고 당신 자신도 놓아줘요.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당신이 그리워하는 그 은서가 될 수 없어요. 그리고 나는… 이제 정말 쉬고 싶어요.”
지우는 울었다. 소리 없는 절규가 그의 온몸을 찢어놓는 듯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제는 그녀를 해방시켜야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계는 여전히 희미한 빛을 내며 그의 손안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그는 늘 이 시계를 움켜쥐고 시간을 돌렸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의 손가락은 시계의 용두(crown)로 향하는 대신, 시계의 유리판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멈췄다. 시간을 되돌리는 대신, 그는 시계를 응시했다.
“미안해, 은서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메말라 있었다. “내가… 내가 너를 너무 아프게 했어.”
은서는 그의 손을 잡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지우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돌릴 수 없었다. 이 시점부터,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은 단 한 번의 기회뿐이었다. 그는 이 은서와 함께, 이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남은 시간을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의 죽음이 다가온다면… 그는 받아들여야 했다.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그녀를 보내줘야 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더 이상의 회피는 없었다. 더 이상의 욕심도 없었다.
그는 시계를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은서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의 손에 닿는 순간 기적처럼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가지 마, 지우 씨.” 은서가 속삭였다. “제발… 이번엔 내 곁에 있어 줘.”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지만, 그 속에서 결연한 의지가 피어나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응, 은서야. 이제… 어디에도 가지 않을게. 너와 함께 있을게. 이 모든 것을… 함께 겪어낼게.”
그는 시계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더 이상 돌리지 않을, 영원히 멈춰진 시간의 기록을 품에 안은 채, 그는 은서와 함께 공원을 나섰다. 그들의 앞에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다시’라는 기회는 없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뿐인 삶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우는, 마침내 그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시계는 그의 품속에서 더 이상 웅웅거리지 않았다. 침묵만이 흘렀다. 영원히 멈춰선 시간의 침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