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598화

밤은 깊었고, 창문 너머 도시는 옅은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지은은 할머니의 낡은 서랍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먼지를 품고 있는 서랍 속에서, 할머니의 오래된 일기장이 빛바랜 표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차가운 공기마저 할머니의 체온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착각에 휩싸였다.

수백 개의 이야기가 담긴 장들을 넘기고 넘어, 마침내 지은의 손이 닿은 곳은 일기장의 거의 마지막 페이지들이었다. 앞서 읽었던 수많은 비밀과 아픔, 희망과 절망의 기록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장들은 어쩐지 다른 무게로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마치 할머니가 평생 감춰왔던 가장 깊고 아픈 심연이 이곳에 봉인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숨을 고르고, 지은은 페이지를 펼쳤다. 할머니 순임의 글씨체는 여전히 단정했지만, 잉크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마치 글자들이 울음을 참는 것처럼 느껴졌다.

1953년 10월 27일

밤새도록 아이의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작은 손이 내 손을 부여잡고 뜨거워질수록, 내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다. 마을의 의원조차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폐허 위에 남은 것은 병과 굶주림,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끝없는 고통뿐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신에게 빌었다. 제발, 제발 이 아이만은….

지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에게는 지은의 아버지 말고도 다른 형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일기장에서 마주한 그 비극은 단순히 ‘세상을 떠났다’는 건조한 사실 이상이었다.

1953년 10월 28일

해가 뜨지 않기를 바랐건만, 야속하게도 새벽은 찾아왔다. 차가운 아이의 몸을 안고 나는 흐느꼈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옆에서 잠든 다른 두 아이를 깨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알면 얼마나 아파할까. 나는 어미였다.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무너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새벽녘, 논두렁을 따라 아이를 묻었다. 내 손으로 흙을 덮으면서, 나의 심장도 함께 묻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나는 걸어야 했다. 남은 아이들을 위해, 나는 살아내야 했다. 차가운 바람이 내 눈물을 말려주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것이.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던 지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흐릿해진 시야로도 할머니의 글씨는 더욱 선명하게 박혀왔다. 지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어릴 적 기억하는 할머니의 그 무뚝뚝하고, 때로는 차갑게 느껴졌던 모습의 근원을. 할머니는 그저 강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어미의 비통함을 가슴 깊이 묻어둔 채,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어코 일어서야 했던 여인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지은은 할머니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깊은 주름들이 단순한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비명 같은 침묵과 묻어둔 눈물의 자국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할머니는 그 슬픔을 어떤 언어로도 표현하지 못하고, 오직 단단한 인내와 묵묵한 책임감으로 삶을 감당해왔던 것이다. 그것이 후대에 지은에게는 ‘무뚝뚝함’으로, ‘정 없는 사람’으로 오해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지은은 일기장을 가슴에 품고 흐느꼈다. 그동안 할머니에게 충분히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것 같아 죄스러웠다. 어쩌면 할머니는 그 강인한 껍데기 속에 숨겨진 여린 마음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후회의 물결이 밀려왔다. 할머니의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차마 드러낼 수 없었던 사랑의 또 다른 형태였다.

어둠 속에서 지은은 흐느끼다 고개를 들었다. 벽에 걸린 낡은 사진 속에서 할머니의 젊은 시절 얼굴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사진 속 할머니는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지은의 눈에는 그 표정에서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감내하고도 굳건히 서 있는 한 여인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보였다.

지은은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이제 이 일기장은 단순히 할머니의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지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자, 시간을 초월하여 이어진 깊은 사랑의 증거였다. 늦었지만, 이제 지은은 할머니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차갑고 단단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뜨거운 불꽃보다도 강렬하고 순수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 새롭게 피어난 이해와 사랑은, 차가운 밤공기마저 따뜻하게 데우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