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속에서 피어난 진실
차가운 공기가 허물어져 가는 연구실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이안의 손끝에서 미약한 전력이 ‘기억 공명기’의 표면을 감돌았다. 지혜는 그의 옆에서 숨을 죽인 채, 고대 유물처럼 보이는 기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직 공명기의 희미한 녹색 빛만이 두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게 마지막 희망이야.” 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수없이 많은 시간을 헤매며 찾았어. 당신의 과거가 이 안에 있다면…”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이미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기억을 잃은 채 이 시대를 떠돌았고, 퍼즐 조각처럼 흩어진 자신의 흔적을 쫓아왔다. 이제, 이 낡은 기계가 모든 것을 알려줄 차례였다.
이안이 심호흡을 하고 공명기의 중앙에 손바닥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내 녹색 빛이 강렬하게 번쩍이며 공명기의 외벽을 휘감았다. 윙, 하는 낮은 진동음과 함께 오래된 디스플레이가 깨어나듯 깜박였다.
“작동하는 것 같아!” 지혜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화면에 잔물결 같은 영상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흐릿한 풍경,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 그리고 빠르게 교차하는 낯선 얼굴들. 이안의 머릿속에서 강렬한 두통이 몰려왔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뇌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아악!” 이안이 신음했다. 그는 공명기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손을 뗄 수 없었다. 화면 속의 영상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 “이안, 기억을 포기해야만 해. 그것만이 그들을 속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 “하지만, 내 임무는…!”
— “임무보다 중요한 것이 있어. 미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잊고 잠시 시간을 거슬러야만 해.”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아니, 지금의 자신보다 더 강렬하고 결의에 찬, 오래 전의 자신의 목소리였다.
화면이 한 장면으로 고정되었다. 황량한 폐허 속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그림자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낡은 시계탑이 솟아 있었다. 그 시계탑은 이안이 이 시대로 넘어온 후 계속해서 꿈에 그리던 장소였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은 자신을 쫓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계탑은… 시간을 넘나들 수 있는 열쇠가 보관된 곳이었다. 그의 임무는 그 열쇠를 파괴하거나 숨기는 것이었으리라.
영상이 다시 빠르게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밝고 따스한 실내였다. 한 여인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이안의 가슴을 찢는 듯한 애틋함이 밀려왔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 이상으로, 사랑했었다.
— “돌아올게. 반드시.”
자신이 그녀에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뒤로 비치는 그림자는… 검은 망토를 두른 자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손에…!
“안 돼!” 이안이 비명을 질렀다. 두통은 비명과 함께 극에 달했다. 기억의 파편들이 산산조각 나듯 충돌하며 그의 의식을 마비시켰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그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지운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잠시 봉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봉인은, 그 여인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혜가 놀라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이안! 무슨 일이야? 괜찮아?”
화면은 마지막 영상과 함께 멈췄다. 검은 망토를 두른 자들의 수장이 화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섬뜩한 시선으로 이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자의 입에서 마지막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 “우리는 너를 찾았다, 배신자. 네가 숨긴 ‘시간의 열쇠’는 우리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네가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공명기의 녹색 빛이 갑자기 붉은색으로 변하며 경고음을 울렸다. 기계의 표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안은 충격과 절망에 휩싸인 채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의 기억은 고통스러운 진실을 토해냈고, 그 진실은 이제 새로운 절망의 문을 열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고, 지키려 했던 열쇠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혜는 붉게 빛나는 공명기와 절망에 빠진 이안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이안의 손을 잡았다. “이안, 정신 차려요!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하지만 이안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의 귓가에는 오직 과거의 비명과 미래의 위협만이 맴돌았다. 공명기는 굉음과 함께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붉은 섬광이 연구실을 집어삼켰다.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이 아닌, 싸늘한 분노와 새로운 결의가 타오르고 있었다.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아야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야 했다.
그의 기억은 비록 고통스러운 진실을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잃어버렸던 삶의 목적을 다시 심어주었다. 그는 더 이상 방황하는 시간 여행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복수를 맹세한 전사였다. 그리고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지켜야 할 마지막 약속의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공명기가 마침내 터지기 직전, 이안은 지혜의 손을 꽉 잡고 결의에 찬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돌아갈 차례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