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603화

차가운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휘감아 돌며 앙상한 가지들을 흔들었다. 눈송이는 솜털처럼 가볍게 허공을 유영하다가, 끝내 땅 위에 내려앉아 오래된 상처처럼 얼어붙은 대지를 희미하게 덮었다. 지아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헤치며 걷고 또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으스러지는 눈의 비명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망토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는 몸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심장을 얼어붙게 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숨결은 뿌연 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이내 사라지지 않고 눈밭 위에 덩그러니 남은 길고 가는 발자국 위에 내려앉았다. 603번째 겨울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겨울이 지나고, 셀 수 없이 많은 눈꽃이 피고 졌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그녀를 지탱해 준 것은 오직 하나,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약속이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게 된 것은. 처음에는 가슴 설레는 맹세이자, 미래를 향한 찬란한 빛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그 약속의 의미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조롱하거나, 혹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 약속을 믿는단 말인가?” 그들의 물음 속에는 비웃음과 함께 체념이 섞여 있었다.

지아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하얀 눈발 사이로 희미하게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피어나는 상처 같았다.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낡은 조약돌 하나를 꺼냈다. 손때 묻고 모서리가 닳아버린 조약돌. 바로 그 약속의 날, 현우가 그녀에게 건넸던 조약돌이었다. 차가운 돌멩이를 쥐는 순간, 손끝에서 잊혔던 온기가 피어나는 듯했다.

“지아야, 이 조약돌을 쥐고 있으면 언제든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생각해 줘. 그리고 언젠가, 가장 아름다운 눈꽃이 내리는 날,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을 짓고, 함께 이 눈을 맞이하는 거야.”

현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그의 눈은 불타는 겨울밤의 모닥불처럼 따뜻했고, 그의 미소는 혹독한 추위를 녹이는 햇살 같았다. 그날의 눈꽃은 세상의 모든 비극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순수했고, 희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날 이후, 현우는 사라졌다. 전쟁이 그들을 갈라놓았고,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했다. 아니, 죽었어야 한다고 했다. 수많은 수색대도,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모두가 포기했을 때에도, 지아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그 약속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이유였다.

어둠이 짙어지자, 눈밭은 더욱 깊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아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그곳’이었다. 현우와 약속했던, 그 눈꽃이 피어나던 언덕이었다. 낡은 지도에 그려진 희미한 표식을 따라 수십 년을 헤매었고, 마침내 그녀는 그 언덕의 기슭에 서 있었다.

언덕은 거대한 묘비처럼 솟아 있었다. 앙상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죽은 자들의 속삭임처럼 웅웅거렸다. 지아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헤치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감, 혹은 모든 것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정상에 다다르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보였다. 그 바위는 마치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린 듯, 눈을 이불 삼아 덮고 있었다. 지아는 바위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위에 쌓인 눈을 손으로 걷어냈다. 차가운 돌덩이가 그녀의 손에 닿았다. 긁히고 패인 흔적이 가득한 바위였다. 그리고 그 바위의 한쪽 면에, 아주 작고 익숙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현. 우. 지. 아.

단 네 글자. 현우와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 혹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기억했다는 증거였다. 지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차가운 볼 위를 타고 흐르는 눈물은 이내 얼어붙었다. 그녀는 바위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절규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그녀의 시야에 희미한 불빛 하나가 들어왔다.

언덕 너머, 아주 멀리, 작은 오두막의 불빛이었다. 너무나 희미해서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불빛은 꺼지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다. 지아는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섰다.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녀의 눈은 그 불빛을 향해 타올랐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뜨거운 불꽃이 그녀의 심장을 다시 데웠다.

그녀는 조약돌을 꽉 쥐었다. 그리고 불빛을 향해, 다시 눈밭을 걷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그녀의 앞길을 밝혀주는 것 같았다. 그 불빛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우일까, 아니면 또 다른 기약 없는 희망의 잔상일까. 603번째 겨울, 눈꽃은 여전히 아름답게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꽃 속에서, 지아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