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마을을 넉넉하게 감싸 안는 오전, 김만복 이장님의 마음속에도 풍요로운 수확철처럼 따스함이 가득했다. 오늘은 일 년에 한 번,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추억의 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장님은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을회관 마당에는 샛노란 국화꽃 화분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고, 갓 쪄낸 송편의 달큰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솔솔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향기 속에는 어딘가 모르게 미완성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이장님, 큰일 났어요!”
새벽부터 부엌을 지키던 박 씨 아줌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평화로운 아침을 갈랐다. 이장님은 굳이 뛰지 않고도 모든 상황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다급함 속에는 절망과 체념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복 이장님은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는 이미 마을 부녀회원 몇몇이 모여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끓어오르는 찜통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박 씨? 송편이 설었수?”
만복 이장님의 농담 섞인 물음에 박 씨 아줌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장님, 단풍쌀이… 단풍쌀이 글쎄 다 시어버렸지 뭐예요! 어제 저녁에 씻어뒀는데, 누가 덮개를 잘못 씌웠나 봐요.”
‘단풍쌀’ 두 글자가 이장님의 귓가에 맴돌았다. 단풍쌀은 이 마을에서만 나던, 붉은빛이 도는 찹쌀로 만든 송편이었다. 은은한 단풍 향과 쫄깃한 식감 덕분에 어르신들의 잔치에는 늘 이 단풍쌀 송편이 올라왔고, 그것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어린 시절의 향수이자 마을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 특별한 쌀은 이제 거의 사라져, 일 년 내내 귀하게 보관했던 것이었다. 잔치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단풍쌀이 상하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장님은 상한 쌀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르신들의 실망할 얼굴이 눈에 선했다. “다른 쌀로 하면 안 될까요?” 한 젊은 부녀회원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박 씨 아줌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이건 그냥 송편이 아니라 어르신들 추억이 담긴 송편인데. 그냥 흰쌀로 만들면 어르신들 서운해하실 거야.”
부엌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만복 이장님은 말없이 부엌을 나와 마을회관 앞마당으로 걸어갔다. 가을바람이 이장님의 헝클어진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잔치를 망칠 수는 없었다. 문득, 30년 전 돌아가신 최 노인과 나눴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최 노인은 일생을 농사에 바치며 여러 품종을 개량했던 분이었다. 그분이 생전에 “단풍쌀이 귀해질 거다. 나중에 혹시 모르니 저 뒷산 너머 밭에 조금 심어뒀다”라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저 노인의 헛소리쯤으로 여겼었다. 그 밭은 이제 폐허처럼 변해 있었을 텐데…
이장님은 결심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박 씨, 송편 소는 미리 준비해 둬요. 내가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박 씨 아줌마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장님을 바라봤지만, 이장님의 단호한 눈빛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님은 마을의 젊은 청년회장 영훈을 불렀다. “영훈아, 최 노인댁 뒷산 밭 기억하냐? 거기 혹시 단풍쌀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랑 같이 가보자.”
영훈은 이장님의 황당한 제안에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이장님의 표정에서 비장함을 읽었다.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이장님과 함께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폐가처럼 변한 최 노인의 옛집은 잡초와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밭은커녕 숲처럼 변해버린 곳을 헤치며 두 사람은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이장님, 여기가 밭이었을까요? 온통 잡초밭인데요.” 영훈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역력했다. 이장님도 마음속으로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햇볕이 잘 드는 돌담 밑 작은 공간에서 유난히 붉은빛을 띠는 벼 이삭 몇 가닥이 눈에 들어왔다. 만복 이장님은 다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허리를 굽혀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단풍쌀이었다!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분명 단풍쌀이었다. 아마도 돌담이 바람과 병충해를 막아주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듯했다.
“찾았다, 영훈아! 이걸 봐!” 이장님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벼 이삭을 거두었다. 이삭 하나하나가 마치 보석처럼 귀하게 느껴졌다. 마을로 돌아오는 길, 이장님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비록 양은 적었지만, 어르신들의 잔치를 망치지 않을 만큼은 충분했다.
마을회관에 도착하자마자 이장님은 큰소리로 외쳤다. “단풍쌀 찾았다! 다들 모여서 쌀 찧고 송편 만들자!”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이 이장님 손에 들린 붉은 이삭을 보고는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삽시간에 마을은 활기로 가득 찼다. 쌀을 찧는 소리, 쿵덕쿵덕 절구질하는 소리, 송편 소를 넣고 빚는 손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장님도 앞치마를 두르고 능숙하게 송편을 빚었다. 단풍쌀은 다른 쌀과 섞여 맛과 향을 더했고, 마을 사람들의 정성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오후가 되자, 마을회관 마당은 어르신들로 북적였다. 잔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만복 이장님은 환한 미소로 어르신들을 맞이했다. 드디어 단풍쌀 송편이 상에 올랐다. 처음 한 입을 베어 문 김 노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맛이야! 이 맛이야!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 그대로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송편을 맛본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감동과 기쁨, 그리고 아련한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어떤 어르신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어떤 어르신은 연신 송편을 집어 들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만복 이장님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특별한 쌀 한 줌이, 그리고 그 쌀을 찾아 나선 작은 노력이 이렇게 큰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 모든 것이 혼자만의 힘이 아닌, 마을 사람 모두의 정성과 지혜가 모여 이루어낸 결과였다.
잔치가 끝나고 어둠이 깔리자, 이장님은 마을회관 마당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 오늘 하루는 위기와 감동, 그리고 기적 같은 순간들이 교차했다. 이장님은 손에 들린, 미처 다 먹지 못한 단풍쌀 송편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큰하고 향긋한 맛. 그것은 단순히 쌀의 맛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따뜻한 마음의 맛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만복 이장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 따뜻한 마을 공동체가 함께라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유쾌한 이장님의 하루는 그렇게, 마을의 밤하늘처럼 깊고 아름답게 저물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