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32화

차가운 공기마저 날카로운 파편처럼 느껴지는 밤이었다. 지은은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몸을 떨었다. 방금 전 그녀를 덮쳤던 기억의 파도는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생생하고 잔혹해서, 마치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격통이었다.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맴도는 마지막 얼굴. 그 눈동자에 비친 절망과 사랑, 그리고 자신을 향한 무한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의 광경. 거대한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고통스러운 비명조차 터져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에 걸렸다.

현우는 지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나, 지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과 연민이 스며 있었다. 그는 지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지만, 그녀는 그의 온기마저 차갑게 밀어내는 듯 보였다.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뛰어 곧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은아, 괜찮아? 무슨 기억이야?” 현우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억누르지 못하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지은이 어떤 기억을 되찾았는지 대략 짐작하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은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물은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현우의 얼굴을 꿰뚫는 듯했다. “그 사람…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어? 왜… 왜 내가 그곳에 있었던 거지? 왜 내가 그 사람을… 지키지 못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찢어지는 듯했다. 조각난 기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를, 아주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려 애썼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실패의 끔찍한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과거의 죄책감으로 아우성쳤다.

현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몇 번인가 달싹였으나, 쉽사리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 순간을 예견하고 있었을까? 지은이 이 기억을 되찾는 순간이 올 것을 알면서도, 그 아픔을 홀로 감당해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을까?

“지은아, 그 기억은… 아직 때가 아니었어.” 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너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그 기억의 파편들이 너를 온전히 집어삼키기 전에, 네가 조금 더 강해질 시간이 필요했어.”

지은은 현우의 손을 거칠게 밀쳐냈다. “보호? 당신이 뭘 안다고 보호를 논해? 이 기억은… 내가 지워버린 내 일부잖아. 내가 이 아픔을 알아야만 해!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왜 그렇게 사라져야만 했는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말해줘!”

그녀의 질문은 울부짖음과 같았다. 기억은 다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거대한 균열, 뒤틀리는 시공간, 그리고 피할 수 없었던 선택. 마지막 순간, 그 사람은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잊지 마… 너는 반드시 살아야 해…”

그때, 갑자기 멀리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작은 탁자 위의 컵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이어서, 바람 한 점 없던 창밖의 하늘이 기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보랏빛과 검은색이 뒤섞이며, 마치 거대한 먹물이 풀리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현우의 얼굴에서 모든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의 눈빛은 다시 날카로운 전사의 그것으로 변했다. “왔군.”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네가 그 기억을 되찾은 순간, 그것들도 네 존재를 감지한 거야.”

지은은 떨리는 시선으로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이 불러온 이 불길한 현상. 무엇이 오는가? 무엇이 그녀를 쫓는가?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잊힌 과거와 연결되어 있었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번엔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각성이었다.

“무슨 소리야? 무엇이 왔다는 거야?” 지은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그 안에는 답을 갈구하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현우는 지은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기억해낸 그 사람이 사라진 순간, 시공간의 한 조각이 뒤틀렸어.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시간의 틈새를 노리는 존재들이 이 세계로 들어왔지. 너의 기억이 그 균열의 ‘핵심’이었고, 이제 네가 그것을 온전히 되찾았으니, 그들은 너를 쫓아올 거야.”

그의 설명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지은의 기억이, 단지 개인적인 아픔이 아니라, 시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사건의 발단이었다니. 그녀의 어깨에 놓인 무게가 갑자기 몇 배로 늘어났다.

하늘의 일렁임은 더욱 격렬해졌고, 멀리서부터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였다. 이 안락했던 은신처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우린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해. 그들이 이 차원에 도달하기 전에.” 현우는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단단하고 따뜻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차가운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기억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돌아온 것이라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잃어야 하는 걸까?

지은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을 보았다. 희미하게 비치는 손금 위로, 그 옛날 누군가의 온기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잊힌 과거가 현재를 위협하고, 미래를 결정지으려 한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 너머의 결의가 서려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은 저주이자, 동시에 그녀를 이끌어갈 단서였다.

“어디로 가야 해?” 지은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