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 달은 기어코 핏빛으로 물든 듯 붉었다. 짙은 먹구름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온 빛은, 지상의 모든 것을 불길한 붉은색 그림자로 드리웠다. 스러져가는 고대 신전의 돌기둥들은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났고, 그 주위를 휩싸고 도는 바람은 잊힌 영혼들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시아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어둠을 가르는 유일한 빛, ‘별빛 조각’이 쥐여 있었다. 심장이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울렸다. 이 심장이 마지막으로 뛰는 순간이 언제였던가. 너무도 많은 시간, 너무도 많은 상실을 겪으며 그녀의 심장은 이미 여러 번 멈췄다가 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왔군.”
차갑고 무덤덤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시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림자가 달빛 아래 춤을 추듯, 한 남자가 신전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마다 희미한 검은 연기가 일렁였고,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빛났다. 카인, 그녀의 오랜 숙적이자 한때는 가장 가까웠던 존재. 그가 이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시아는 예감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늦었군. 망설였나?” 카인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네가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지만, 이번엔 너무나 오래였어.”
시아는 천천히 일어섰다. 몸을 일으키는 동안 그녀의 무릎에서 뚝, 뚝, 하고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전 바닥의 잔해가 무릎을 짓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카인의 뒤편, 거대한 제단 위에 놓인 검은 수정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정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어둠을 빨아들이며 pulsating하고 있었다.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은… 그녀의 여동생, 리아의 영혼이었다.
“망설인 것이 아니다. 단지… 확신이 필요했을 뿐.” 시아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확신이라니. 이제 와서?” 카인이 코웃음을 쳤다. “결국 넌 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 리아의 영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은 어둠에 잠식될 테니. 네가 가진 그 별빛 조각의 힘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 않나.”
시아는 손에 쥔 별빛 조각을 꽉 쥐었다. 별빛 조각은 그녀의 불안을 반영하듯 희미하게 떨렸다. 카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리아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은, 그녀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검은 달’의 힘을 빌리는 것. 하지만 그 대가는… 그녀 자신마저 어둠에 잠식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달빛 아래 춤추는 그림자는 언제나 희생을 요구했지.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리아의 구원이라면,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해.” 카인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시아를 집어삼킬 듯이 길게 드리워졌다.
“대가는 각오했다.” 시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눈빛은 달빛을 닮아 더욱 차갑고 투명해졌다. “하지만, 네 방식대로는 안 돼.”
카인의 얼굴에 드리워진 냉소가 사라졌다. “오만하군. 네가 감히 나를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 힘만으로는 리아를 구할 수 없어. 오직 내가 가진 ‘어둠의 계약’만이 리아의 영혼을 완벽하게 되돌릴 수 있다.”
“네가 제시하는 어둠의 계약은 리아를 구원하는 동시에 너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할 것이다.” 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리아를 두 번 잃을 수 없다.”
“두 번이라니? 네가 처음부터 리아를 지켜주지 못했던 것 아니었나?” 카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시아의 가장 깊은 상처를 건드렸다. 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리아를 잃었던 그 날의 악몽이 뇌리를 스쳤다. 자신의 미숙함, 자신의 약함 때문에 리아가 어둠에 휩쓸렸다는 죄책감은 시아를 단 한 순간도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엔 달라야 해.” 시아는 손에 든 별빛 조각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붉은 달빛 아래에서 조각은 푸른 별빛을 뿜어냈다. 그 빛은 어둠을 잠시나마 밀어내며 신전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카인이 뒷걸음질 쳤다. “네가… 네가 설마… 그 ‘태초의 의식’을 사용하려는 건가? 미쳤군! 그 의식은 시전자마저 소멸시킬 거야! 게다가 네 힘만으로는 그 거대한 제단에 갇힌 영혼을 온전히 되돌릴 수 없어!”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 시아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제단 위, 리아의 영혼이 갇힌 검은 수정이 그녀의 존재에 반응하듯 더욱 격렬하게 빛났다. 검은 빛은 시아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그녀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럼 누구와 함께하겠다는 거지? 이 신전에는 너와 나, 그리고 저 죽어가는 영혼밖에 없어!” 카인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시아가 가진 잠재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두려워했다.
시아는 제단 앞에 섰다. 차가운 돌에 손을 대자, 제단은 그녀의 체온을 흡수하듯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억 속의 목소리를 더듬었다. 오래 전, ‘윤 노인’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달빛 아래 춤추는 그림자는 때때로 두 개의 존재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달빛 아래 춤추는 그림자는… 둘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춤을 춘다.” 시아는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카인을 향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심연 같았지만, 그 깊이 속에서 미약하게 흔들리는 빛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의 어둠과… 너의 별빛이 함께한다면, 리아의 영혼을 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아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너는 리아에게 진 빚이 있지 않나. 네가 리아를 어둠으로 이끌었으니, 이제 다시 빛으로 돌려보낼 책임이 있어.”
카인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의 얼굴은 복잡한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시아의 제안은 예상 밖이었다. 자신과 함께 리아를 구원하자는 것.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의 어둠을 시아의 빛과 섞는 위험한 행위였다. 자신의 힘이 정화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존재 자체마저 위협받을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리아를 구원하는 대신, 너의 계획대로 내 힘을 약화시킨다는 건가?” 카인의 목소리에 다시 비웃음이 돌아왔지만, 전만큼 확신에 차지 않았다.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정화하는 것이다.” 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너는 리아를 사랑했지 않나. 비록 네 방식이 뒤틀렸을지라도, 너의 마음속 깊은 곳에 리아를 향한 진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마음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해야 해.”
신전 안에 흐르는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제단 위의 검은 수정은 격렬하게 진동하며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리아의 영혼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시아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카인의 눈을 응시했다.
“선택해, 카인. 리아를 영원한 어둠 속에 가둘 것인지, 아니면 나와 함께 그녀를 구원할 것인지.”
카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리아의 밝은 웃음, 그녀의 따뜻한 시선, 그리고 그가 어둠에 잠식되어 가던 순간에도 자신을 놓지 않으려 했던 리아의 손길… 그 모든 것이 카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달빛은 더욱 붉어졌고, 그림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신전 곳곳에서 꿈틀거렸다. 마침내 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는 포기,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네 뜻대로 해라.” 그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것 같았다. “하지만 명심해라, 시아. 만약 실패한다면… 너와 리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나에게 종속될 것이다. 영원히.”
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카인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든 별빛 조각을 제단 위에 내려놓았다. 푸른 별빛이 제단을 감싸 안으며, 검은 수정의 어둠과 격렬하게 부딪혔다.
“내 손을 잡아, 카인.” 시아가 다른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달빛처럼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뜨거웠다.
카인은 망설였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결국 그는 시아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거친 그의 손이 시아의 부드러운 손을 감싸자, 두 사람의 그림자는 달빛 아래에서 하나로 겹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제단 위에 놓인 별빛 조각과 검은 수정에서 거대한 빛과 어둠의 파동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전 전체가 흔들렸다. 하늘을 가르던 붉은 달빛이 잠시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펼쳐졌다. 어둠과 빛이 격렬하게 춤추는 그 중심에서, 시아와 카인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제 두 그림자는 달빛 아래에서 새로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춤의 끝에 구원이 있을지, 아니면 더 깊은 나락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195화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