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624화

김지훈은 먼지 쌓인 서재 창밖으로 잿빛 하늘을 응시했다. 창틀에 맺힌 물방울이 느리게 흘러내리며 도시의 희미한 불빛을 왜곡시켰다. 며칠 밤낮으로 어머니의 오래된 짐들을 정리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낡은 상자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찢어지고 바랜 그 사진은 시간의 강을 건너온 유령처럼 그의 손안에서 떨렸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서연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낯선 할머니 한 분이 온화한 미소를 띠고 서 있었는데, 서연을 감싸 안은 그 손길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사진의 한쪽 구석, 나무 그림자에 가려 희미하게 자신도 보였다. 초등학교 소풍 때 몰래 찍었던 사진이었다. 자신이 서연에게 장난을 걸다 찍힌 순간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이 낯선 할머니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다. 서연이 가끔 지방의 친척 집에 간다고 했던 기억은 있지만, 이렇게 다정하게 함께 찍힌 모습은 처음이었다.

“서연아…”

지훈의 목소리가 텅 빈 서재에 낮게 울렸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맨 지 수십 년. 단서라고는 희미한 기억과 가끔 손에 잡히는 조각난 흔적들뿐이었다. 이 사진은 그 조각들 중에서도 특히 선명하게 빛나는 조약돌 같았다. 그는 사진을 들어 올렸다. 흙먼지 낀 한옥 대문 앞에서 찍힌 것이었다. 뒤편으로는 오래된 기와지붕과 고목이 희미하게 보였다.

갑자기 오래된 기억의 파편 하나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여름 방학, 학교 운동장에서 홀로 벤치에 앉아있던 서연. 그의 옆에 앉자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지훈아, 나 이번 여름에 시골 할머니 댁에 가. 거기 가면… 마음이 좀 편해져.”

그때의 서연은 늘 어딘가 위태로웠다. 또래 친구들과는 다른 깊이를 가진 눈빛, 가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나누던 속삭임 속에는 말 못 할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서연이 ‘할머니 댁’이라고 지칭했던 곳이 혹시 이 사진 속 한옥이 아닐까 하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 낯선 할머니가 서연의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상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지훈은 곧장 서재 책상에 앉아 낡은 수첩을 꺼냈다. 어머니가 쓰시던 옛 지인들의 주소록이었다. 어머니의 고향 친구들 중 혹시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 한 장 한 장 넘겨갔다. 찢어진 페이지들 사이에서, ‘김복순 – 경북 영주시 산곡동’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자주 언급하던 고향 친구였다. 산곡동, 어쩐지 사진 속 한옥의 풍경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밤늦도록 그는 영주시 산곡동 일대의 옛 지도를 검색하고, 부동산 기록을 뒤졌다. 놀랍게도 그 동네에는 아직 옛 정취를 간직한 한옥들이 드문드문 남아있었다. 다음 날 아침, 첫 기차에 몸을 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역에서, 그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탐험가처럼 고독했다. 서연의 그림자를 쫓아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왔던가. 이제 그의 발길은 다시 한번 미지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주역에 도착하자 싸늘한 바람이 그를 맞았다. 도시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고즈넉한 풍경. 그는 택시를 타고 산곡동으로 향했다. 굽이진 시골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시간이 멈춘 듯한 작은 마을이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황토색 담장이 줄지어 늘어선 골목길을 지나, 그는 마침내 사진 속 한옥과 흡사한 집을 발견했다. 하지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마당은 잡초로 무성했다. 버려진 지 꽤 된 듯 보였다.

지훈은 한옥 주위를 서성였다. 혹시 주인이 바뀌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버려진 걸까. 그때, 옆집 담장 너머에서 고개를 내미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곱게 빗어 넘긴 흰 머리카락과 인자한 눈빛. 어머니의 주소록에서 본 김복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 죄송하지만 혹시 김복순 할머니 되세요?”

지훈의 말에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 내를 우째 알고 찾아왔능교. 서울서 왔는가베? 인물이 훤하네.”

그는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김복순 할머니는 반가워하며 그를 마루로 안내했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사진을 내밀었다.

“할머니, 혹시 이 사진 속 분을 아세요? 이 집에서 찍은 것 같은데…”

김복순 할머니의 눈길이 사진 속 낯선 할머니와 서연에게 머물렀다. 할머니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번졌다.

“아이고… 강 할매하고 저 아이구나. 잉, 여가 맞다. 이 집은 원래 강 할매가 살던 집이었지. 서연이는 강 할매가 돌보던 아이였어.”

지훈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돌보던 아이’라니. 그는 서연이 시골 할머니 댁에 간다고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돌보던 아이’라는 표현은 분명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 할머니는… 서연이의 친척이 아니셨나요?”

김복순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여. 강 할매는 한 평생 고아들을 돌보던 분이셨어. 이 마을 끝자락에 작은 보호소가 있었거든. 서연이는… 그 보호소에 잠깐 머물렀던 아이였지. 학교 다닐 적에는 여기 강 할매 집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녔고.”

지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연은 그에게 한 번도 자신의 힘든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늘 밝고 씩씩한 모습만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의 가슴속에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이 밀려왔다. 자신이 알던 서연의 모습은 그녀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상처를 알지 못했다는 회한이 그를 덮쳤다.

“서연이가… 왜 그 보호소에 있었는지, 아세요?”

김복순 할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제. 다만, 서연이가 엄마 아빠 없이 자랐다는 소문은 있었어. 도시에서 내려왔는데, 어른들 눈에는 늘 마음고생이 많아 보였지. 그래도 강 할매 덕분에 참 밝게 컸어. 재주도 많고, 정도 많고.”

지훈은 사진 속 서연의 미소를 다시 보았다.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그림자를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첫사랑은, 그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아픔과 비밀을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 동안,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강 할머니와 서연이는… 그 후로 어떻게 되셨나요?”

할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났어. 강 할매가 편찮으시다는 소문은 돌았는데, 그 길로 짐을 꾸려 서연이랑 같이 사라졌지. 그 보호소도 문을 닫고. 그 뒤로는 아무도 소식을 모르네. 아마 서울로 간다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훈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서연은 그에게 늘 ‘시골 할머니 댁에 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도시의 아픔을 피해 이곳으로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났던 것이다. 그는 서연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그녀의 과거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실타래였다. 사진 속 낯선 할머니는 단순한 친척이 아니었다. 그녀는 서연의 아픔을 보듬어준 은인이자, 그녀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지훈은 손에 쥔 사진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그는 서연의 과거 속 깊은 상처의 흔적을 쫓아야 했다. 산곡동 끝자락에 있었다는 보호소. 그곳에 분명 서연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 할머니…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그녀만이 서연의 사라진 시간 속 진실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골길을 걸으며, 지훈은 한층 더 무거워진 마음으로 보호소가 있었다는 마을 끝자락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서연의 진짜 모습이 한 겹씩 벗겨지는 듯한 아픔과 동시에,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는 강렬한 희망이 교차했다. 그의 첫사랑은 여전히 멀고 아득했지만, 이제 그는 그녀의 심장이 뛰던 진짜 장소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의 탐정 생활은 계속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