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짙은 남색 벨벳 위에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를 흩뿌려 놓은 듯했다. 서울의 빌딩 숲 위로도 희미하게나마 별들이 반짝이는, 그런 특별한 밤이었다. 스튜디오 안은 따뜻한 조명 아래, 익숙한 기계음과 서진의 나직한 숨소리로 가득했다. 헤드폰을 고쳐 쓰고 마이크를 당기자, 작은 불빛이 켜지며 그의 시간임을 알렸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안녕하세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서진입니다.”
서진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오늘은 어딘가 깊은 울림이 있었다. 제49화. 수많은 밤을 함께했지만, 오늘 밤은 유독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사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늘 첫 곡은 김현식 님의 ‘내 사랑 내 곁에’였습니다. 이 노래를 신청해주신 분은 ‘새벽별’님입니다. 사연과 함께 보내주셨는데요,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인쇄된 종이를 집어 들었다. 글씨 한 자 한 자에 담긴 애틋함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서진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밤, 잊고 살았던 오래된 약속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아주 오래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던 날 밤이었죠. 도시를 벗어나 시골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세상의 모든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어요. 그때 그 사람이 그랬어요. “저 별들처럼 우리 마음은 언제나 저 위에서 빛날 거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가장 빛나는 별 아래에서 다시 시작하자.” 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은 그 약속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 별들이 빛나고 있겠죠? 저는 제자리에서 그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도, 부디 이 밤하늘 어딘가에서 저와 같은 별을 보고 있기를 바라며, 김현식 님의 ‘내 사랑 내 곁에’를 신청합니다. 그 사람에게 닿을 수 없는 저의 마음이 부디 이 노래에 실려 전해지기를….
사연을 읽어 내려가는 서진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렸다. 마지막 문장을 읊조렸을 때, 스튜디오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도 잊고 있던 밤하늘 아래의 약속, 그리고 한 사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흐릿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잃어버렸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의 손이 마이크를 감싸 쥐었다. 한숨을 깊게 내쉰 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새벽별님, 소중한 사연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비슷한 약속을 했던 밤이 떠오르네요. 모든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던 밤. 그 밤하늘 아래서, 우리는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죠.”
서진의 시선은 스튜디오의 유리창 너머, 희미하게 빛나는 밤하늘에 닿았다. 그의 눈빛은 아련했고, 어딘가 깊은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아니라, 그 약속이 너무 커서… 우리의 작은 어깨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약속의 의미가 사라지는 건 아니죠. 새벽별님 말씀처럼, 그 사람도 지금 어딘가에서 같은 별을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같은 추억을 떠올리며, 같은 노래를 듣고 있을지도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슬픔을 감추기 위한 가면처럼 위태로웠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수많은 별들이 뜨고 졌지만… 어떤 기억은 영원히 반짝이며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기억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으니까요. 어쩌면 그 별들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건, 지난날의 후회나 지키지 못한 약속이 아니라, 그래도 괜찮다고,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건 아닐까요.”
서진은 다음 곡을 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의 밤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아득한 과거의 밤으로 돌아간 듯, 아릿하게 울렸다. 그때 그에게 약속했던,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별을 올려다보고 있을 그 사람에게 닿지 않을 목소리로,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너도… 지금 그 별을 보고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가지 않았다. 스튜디오 안의 모든 소리가 멈춘 듯 고요했다. 그 밤, 별들은 여전히 서진의 마음속 비밀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오랜 상처와 약속을 품은 채로. 그리고 그 침묵은, 다음 이야기가 시작될 준비를 알리는 서곡과도 같았다.
